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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1*12월호 [연재기획]'엄마와 딸'-엄마노릇과 내 삶의 중간성적표_안태윤
◎ 연재기획
①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
② 자매애는 있는가
③ 행복찾기
④ 여성주의자, ‘관계’ 속에서 나를 보다
⑤ 여성주의자, ‘관계’ 속에서 나를 보다
두 번째 이야기 ‘엄마와 딸’
엄마노릇과 내 삶의 중간성적표
안태윤 ●
누가 나에게 이제까지 해본 일 중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당근 나는 자식키우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올해 대학에 들어간 큰 딸은 스무 살이 되었건만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그녀의 방황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딸이 돐이 되어 마악 걸음을 떼기 시작했을 때 나도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공보육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일본이어서 좀 다행이었지만 처음 보육원(우리나라의 어린이집 같은 곳)에 돌백이를 떼어놓고 나올라치면 안 떨어지려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보육원 건물을 나올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그 울음소리가 마치 나의 뒷덜미를 잡는 듯 했다. 엄마랑 강제로 떨어지는 이 경험이 어딘가 아이 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아 혹시 성격형성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5년 반 동안 보육원을 다니면서 거의 매달 감기를 달고 살았다. 나 때문에 아이가 안 걸려도 될 감기를 자주 앓고 안 먹어도 될 약을 먹는다 생각하니 그것도 속상했 다. 그래도 한 번도 공부를 그만두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음~ 뭐랄까 이 외국 땅에서 아이 보면서 집에만 틀어박혀 사는 내 인생을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런 희생을 치르고 대학원을 나와서 딱히 뭘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고, 아니 매우 불투명했지만 어머니라는 정체성 하나만으로는 내가 안정되게 설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귀국해서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갔다. 일본에서 흙만 가지고 놀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의 분위기와는 영 딴판이었다. 동네에 사는 같은 학교 친구들은 요일마다 영어니 체육이니 팀으로 하는 과외를 하느라 바빴다. 그 팀에는 누구 한 사람 나 올 때까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갔다. 유치원 때부터 짜여진 팀이란다. 아이는 그런대로 잘 적응해 갔지만 나는 아이들 교육에 극성을 떠는 엄마들 모습에 적응이 잘 안 되었다. 그 첫째 이유는 솔직히 내가 무슨 대단한 교육관이 있어서라기보다 실은 내 공부하랴 강의하러 다니랴 바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3학년때 쯤이던가 수학이 너무 떨어져서 동네 학(부)모에게 과외를 시켰다.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가 이렇게 수학이 안 되는데 어떻게 밖에 나가서 남의 아이들 가르치고 있느냐고. 다음날 그녀는 나에게 전화로 사과했지만, 난 그게 그녀의 본심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영 적응을 하지 못했다. 아침 마다 오늘 학교에 가기 싫다, 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하였다. 수업분위기나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 싫다는 거였다. 아이의 그런 마음이 드러났는지 몇 번 선생님들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찍혔는지도’모르겠다. 급기야는 담임선생님께 불려가 수업분위기를 해친다는 야단을 듣고 죄송하다는 사과를 했지만 선생님은 분이 풀 리지 않는 듯 했다. 결국 나의 연구차 미국에 갈 때까지 한 학기 동안 아이는 매우 힘겨운 학교생활 을 해야 했다. 나중에 이런 사정을 중학생을 둔 친지에게 이야기하자 예상치도 못한 충고가 나왔다. 처음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갔을 때 빈 손으로 갔느냐고, 일이 악화된 원인은 거기에 있다는 거였다. 나는 아연했다.
미국에 가서 사는 동안 이미 시작된 딸애의 사춘기는 멈출 줄 몰랐다. 한 번은 학교 에서 난데없이 경고장같은 것이 날아왔다. 체육시간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고 있으니 이번 학기 낙제를 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있어 잘 해볼 요량으로 학교에 전화를 걸어 우선 체 육선생님에게 죄송하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선생님왈, 나한테 어머니가 죄송할 거 없다, 아이가 태도 를 바꾸면 된다는 간단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에서와 다른 선생님의 반응이 너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딸애는 혼자 미국에 남아 고등학교를 다녔다. 처음엔 순조로와 보이더니 고3 마지막 학년에 는 써스펜션이라는, 한국으로 치면 정학인지 근신인지를 한 여덟 번 쯤 받았다. 학기말엔 대학의 입학 허가서는 받았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간당간당한 지경이었다. 정학을 알리는 편지가 하도 와서 우체통 열기가 두려워진 때였다. 아이가 집에 전화를 해도 가슴이 철렁했다. 학교가 싫어진 아이는 고등학교 졸업 못해도 상관없다, 한국으로 오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어떨 땐 불러들이고 싶고 어떨 땐 너무 화가 났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주위엔 온통 조기유학가서 아이비리그에 들어간 똑똑하고 착한 범생이 어머니들이 쓴 자랑스러운 수기뿐이지 않은가. 그간 보니 아이를 조기유학 보낸 엄마들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었다. 미국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학원의 설명회 에 다니고, 아이들이 방학 때 오기가 무섭게 스케쥴을 관리해서 과외를 시키고 학원을 보내는 건 기 본이었다. 추수감사절 같은 짧은 방학엔 엄마들이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과외를 시킨단다. 대학입학에 유리하도록 해외 오지를 찾아 ‘봉사활동’을 보내고, 원서작성은 전문가에게 돈을 주고 맡긴단다. 그런 극성스런 모습들을 비웃었지만 막상 아이가 이렇게 되고 보니 뿌린 만큼 거두는 건가, 내 정성이 부족해서 아이가 이렇게 된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논문 막바지에 바빠서 아이의 초등학 교 졸업식에 못(아니 안)간 일, 수업 참관에 안간 일, 아침에 아이보다 늦게 일어난 일, 운동회 때는 끝날 무렵에 가서 처음부터 본 양 아는 척했던 일, 바쁘고 피곤해서 숙제를 물어오는 아이에게 숙제 는 혼자 힘으로 하는 거라고 짜증냈던 일 등 내 일과 공부 때문에 많고 많은 나의 어머니 노릇 대충 대충하기(혹은 유기)의 무수한‘전과’들이 떠올랐다.
아이가 한창 방황하던 작년과 올해 나는 우리 딸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면 어떡하나 고민했었다. 그리고는 내 인생의 중간성적표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나의 학위취득이나 취직과 같은 성취도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이나 대학입시에 실패한다면 상쇄되고 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같은 부모의 입장이지만 남편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성취와 아이의 문제를 별개로 생각하고 있었고 나와 같은 어떤 ‘근원적인’죄책감도 없었다. 머리로는 모성은 본능이라는 본질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자식의 문제에 내 책임이 몇 퍼센트일까 끊임없이 따져보고 있었다.
아이는 유학 가 있는 동안 여러 가지 비행을 골고루 다 해본 듯 했다. 화도 나고 속상한 건 이루 말 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기회도 되었다. 나 역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많이 했 지만 딸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가졌던 어머니 덕분에 크게 문제화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전엔 몰랐지만 ‘우리 엄마만큼 엄마 노릇하기도 어려운 거구나’ 뒤늦게 어머니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아이는 운 좋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도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고민이 끝난 건 아니다. 아니 산 넘어 산이다. 한 학기도 보내기 전에 딸애는 일찌감치 휴학을 결정한 듯하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찾아야겠단다.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우선 대학을 때려치는 일이다. 딸이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하게 할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또 딸의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에 나의 책임이 몇 퍼센트 포함되어 있는지 따져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처럼 아이에게 ‘도대체 엄마가 뭘 잘못했느냐’고 따져 묻게 될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중학교에 들어간 둘째딸의 반항도 이제 막 시작이다. 한 번 연습을 했건만 또 새롭다. 휴우~ 숨 한 번 고르고 또 전쟁같은 어머니노릇을 계속해내야 한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아이로 키워내야 하는 임무와 호락호락 그렇지 되지는 않는 아이 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사는 정체성을 주는 나의 일, 이 세 가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게 나의 어머니로서의 현재 성적표이다. 여기까지 쓰면서 돌아보니 이제까지 그런대로 이 줄타기에서 아슬아슬하게나마 균형을 잡아 온 것은 두 가지 덕분이 아닌가 한다. 하나는 모성은 이데 올로기이며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 페미니즘과, 또 하나는 자식농사의 부실한 점 수 때문에 상쇄되더라도 전체 내 인생의 성적표가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도록 해줄 수 있는 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여성들에게 더 많은 사회적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래서 여성들이 어머니로서만이 아닌 인간으로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가질 때 모성의 굴레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을 거라고.
안태윤 ● 경민대학 교양과 전임강사.
‘사회적으로 바람직한’아이로 자라주지 않는 아이 덕분에 왜 아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어머니에게 가는가 하는, 개인적이며 동시에‘반사회적인’울분에서 모성을 연구하기 시작. 역사적으로 보니‘한국사회에서 모성은 사회와 국가와 남성들의‘밥’이었구나!!!’가 저서『식민정치와 모성』에서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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