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er board list icon](/assets/common/header-board-list-icon-871ea5b4968af0aff7ac9000984dc947.png)
2008 1*2월호 [문화산책] 최악의 조합, '사랑하는 친구'
[문화산책]
최악의조합, ‘사랑하는친구’
6년째 연애중 2008, 감독-박현진
신나 ●
6 년째 기념일에 만난 두 연인의 테이블. 예쁜 초와 와인, 선물, 갖출 것은 다 갖췄다.
이제 활짝 웃으며“사랑해”를 속삭이고 기념사진 한 장 남기면 되는데…. 어라, 이 두 남녀의 표정이 심란하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부는지, 꽉 잡지 않으면 와인이고 선물이고, 사람까지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이렇게 바람 잘 날 없는 6년째 연애가 시작된다.
6년째 기념일에 차를 마련한 기념으로 남자의 차 안에서 카섹스가 벌어진다. 뭔가 시작되려는 찰나, 여자의 가슴이 아프기 시작한다. 아랑곳 않고 제 욕심 채우기에 바쁜 남자를 밀쳐 결국 분위기를 망가뜨린 다음날, 여자는 병원에서 가슴을 찍어누르는 검사를 한다. 가슴에서 발견된 조그마한 혹. 그리고 둘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짧게 해 본 것들은 모르는’, 그러나 6년쯤 해 본 이들은 너무 잘 아는 연애사를 다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엄청 꿀꿀해진다.
전형적인 6년차 연인들의 관계를 이리 자연스럽게 보여주다니, 처절할 지경이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얼마며, 그이유는 호르몬의 화학작용이 어쩌고 그런 얘기 하지 않아도 둘은 이미 ‘가족같은’존재다.
남자친구 어머니에게서 받는 상품권은 엄마한테서 받는 용돈과 다르지 않고, 굳이 알리지 않고도 여자친구 어머니 댁의 수도를 고치고 바닥청소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이 6년차 연인들에게‘사랑하는 친구’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사랑’도 아니고‘친구’는 더더욱 아니다.
‘ 딸같고 동생 같은’여자친구는 이제‘맛있지’도 않고 여자친구가 가슴이 아픈 바람에 섹스를 못하게 된 불만은 진짜‘친구’에게만 털어놓는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을 추진하는 남자친구 어머니에 대한 불만도 진짜‘친구’만이 들어줄 수 있다.
이렇게 6년 된‘사랑하는 친구’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 되어버린다.
둘은 오래된 연인답게 서로를 너무 잘 안다. 각자의 사적인 영역을 보장하기 위해 따로 살지만, 통화를 하면서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숨겨둔 와인이 어디 있는지, 처음 본 칫솔이 언제 등장한 것인지도 다 안다.
그러나 둘은 정작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왜 옆집으로 이사를 온 것인지, 왜 둘은 결
혼을 해야 하는지, 지금 무엇 때문에 괴로워 하는지, 평생 후회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하는 이야기는 계속 미뤄진다.
둘 사이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이야기는 다른 곳을 통해 분출하고, 그 결과는 예정된 수순을 밟는다.
이 영화는 시종 여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엄청나게 많은 대사들을 늘어놓지만, 그것은 여자가 상대방의 행동을 조용히 주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지, 남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연인들의 비틀린 연애가 깨져가는 상황을 그리면서 감독은 남자가 온갖 ‘추태’를 다 부리게 하지만, 여자들에게는 적정선을 넘지 않도록 면죄부를 준다.
내가 답답해지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어쨌든‘추태’를 부리는 쪽이 더 나빠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바라만 보는 여자의 입장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슴 속에‘혹’-뭔가 답답한 구석-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여자의 시도는 거기서 멈춰버렸다.
그녀는 문제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것을 회피하고는, ‘나 상처받았어~’하면서 서둘러‘혹’을 떼어버리고 말았다(마음의 혹 말고도 극중에서 가슴의 혹을 제거하는 수술장면이 나온다).
표면적으로 그녀는 피해자였고, 그런 믿음이 그녀가 더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은 것이 아닌가 하는 아
쉬움이 남는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결말이 어떤 것 같냐고.
영화는 열린 결말을 채택했고, 우리는 각자의 구미에 맞는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영
화의 결말은 미덕과 악덕을 둘 다 갖고 있는데‘패인(敗因)에 대해서는 분석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미덕과 함께‘(그런 거 다 잊고) 그래도 다시 노력한다면 내가 이 관계(그리고 그)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악덕이 그것이다.
난 윤계상이 좋아서 영화관에 갔지만, 한편으론 내 지난 연애사를 돌아보고 싶어서 갔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연애사에 참고가 될까 해서인지도. (내 지난 연애는 6년의 데드라인을 넘기자마자 영화처럼 끝났고, 현재의 연애는 6년을 앞두고 있다.)
과거의 패인을 분석하는 데 한참 걸렸다. 이런 영화가 지금 나오다니 분하기도 하다. 6년 전에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6년째 연애중이라. 둘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지금 깨지든지,좀 있다 깨지든지.
‘ 사랑하는 친구’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온다면 꼭 이 때쯤이다, 내 경험상으로도.
그러나, 패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아무리 아깝더라도 지금이다.
요즘 읽은 책 중에서 인상깊은 구절이 있어 옮겨 본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라도, 학교에 계속
남아있고 싶어 우는 것은 아니다.” 박완서,『 친절한 복희씨』中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