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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4월호 [문화산책]열정의 고흐는 어디가고?_폴
문화산책
열정의 고흐는 어디가고?
폴 ●
십대 시절,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화가가 되려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내가 미술을 전공할 수 있게끔 심적으로 지지받는 일은 쉬웠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후원을 받기에는 스스로도 미안했고 또 형편도 되지 않았다. 이로서 화가로서의 꿈은 잠시 접었다. 물론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면 무리하면서라도 도전해볼 수 있었겠지만, 맹목적으로 달려가기에는 잔재주일 가능성의 무게가 대단했음으로 미리 절망하였다. 무엇이든 간에 확신을 가지기란 어려웠다. 그리고 그이처럼 광기어린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라면 굳이 내가 붓을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 속 깊이 꼭 닮고 싶은 화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미칠 것 같았다. 최승자 시인의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를 처음 읽었을 때보다 더 강렬한 느낌과 혼돈스러움을 내게 주었다. 반 고흐, 혼란스럽게 보이는 삶을 끝내 바득바득 버텨낸 고흐. 고흐의 평생 후원자 테오, 착한 동생을 가진 고흐가 부럽기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알 수는 없다만, 자신의 귀를 잘라 내어버린 그 과감성. 처음에는 이런 그의 열정에 빠져버렸다. 귀를 잘라버린 고흐, 그리고 그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었던 고흐. 소위 반 미치광이 같은 그의 열정, 그에 부합되는 강렬한 붓 터치. 정말 너무 만져보고 싶은, 내 손 끝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 만난 고흐
고흐를 느끼기 위해서, 그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바로 앞에서 실감하기 위해서 얼마나 훌쩍 비행기에 오르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고흐에게로 향한 마음은 단지 마음뿐, 비행기에 오를 용기도 내지 못했고 돈도 없었으니 마냥 그의 자화상 엽서를 부적처럼 치어다볼 수밖에-그러던 차, 2002년 밀레展[밀레의 여정]이 열렸다. 당시 왜 고흐가 아닌 밀레展이 먼저 열리는 것인지 우습게도 고흐의 팬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때, 한 쪽 편에 고흐의 그림들이 아주 살짝 몇 점 전시되었기는 했다. 그러나 고흐의 열정을 느끼기에는 부족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5년 후인 지난 해 말 드디어 고흐展이 열려졌다. 정말 두근두근, 얼마나 미술관으로 뛰어가고 싶던지. 실제로는 바빠서였지만, 마치 맛있는 과자 자근자근 혼자서 아껴 먹으려는 어린 아이처럼 나는 전시가 시작된 날부터 전시를 보러 가기 직전까지 고흐展에 대한 기대감을 마구 부풀렸다.
거짓말, 다 거짓말
미술관 홈페이지를 보니 주중 오후 7시에 입장하면 2천원 할인도 해주고 나름 한갓지게 관람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였겠는가. 무엇보다 고흐展이 열리는 미술관이 사무실과 지척 거리에 있다는 것은, 평동 활동가로서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게 하던지. 열심히 활동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끔하기도 했다. 그래서 며칠 전 부랴부랴 일을 정리한 뒤에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고흐를 만나러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매표하는 곳에 길다랗게 늘어진 인파들을 본 순간부터 기대감은 점차 걱정으로 변해갔다. 분명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주중 7시 이후에 관람객이 많지 않으니 좋다고, 가능하면 이때쯤 보러 오는게 어떻겠냐는 뉘앙스의 공지를 했던 걸 분명 봤는데!
고흐, 당신은 정말 감동적이었지만
후우-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표를 사서 미술관에 들어섰다. 일단 너무 시끄러웠다. 높은 천장 때문에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기 마련인데, 사람이 너무 많았던지라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은근 귀를 따갑게 했다. 소음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나보다 앞선 관람객들에 가려져 제대로 그림을 볼 수가 없었다. 본래 고흐의 그림 하나하나를 마음으로 외우고 싶었지만, 절대로 내가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처럼 고흐의 그림들과 조우할 수가 없었다. 겨우 다 훑을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전시장 안에 마련된 상점에서 고흐 그림엽서를 한 장을 사곤 ‘이렇게라도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었던 게 어디야, 역시 고흐 그림은 최고구나’라고 애써 위로했다. 이번 전시를 다녀온 다른 친구들의 경우에는 이름난 그림들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다고 평했지만, 나에게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전시 내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유명한 작품들이야 그림책에서도 보아왔던 것들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펜으로 그린 고흐의 습작들이나 판화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새로웠다. 아무튼 내용을 떠나서 문제는 관람 문화였다. 떠들고 몰려다녔던 관람객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조용하고 기분 좋게 그리고 충분하게 관람을 할 수 있는지 적정 관람객 수를 알아보고 이에 따라서 매표 간격을 조정했어야 했던 게 아닌가. 매표 간격 조정 말고도 다른 방법들이 있을 수도 있고. 사실 이런 이유로 유명 화가의 전시를 굳이 가지 않는 편이었다. 내게는 여유롭게 그림을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인사동 거리 구석구석의 작은 갤러리들이 더 좋다. 무명 혹은 신인 혹은 비주류 예술인의 작품들은 물론이고 이들의 그림을 보러 온 관람객들의 표정에는 생동감이 있다. 다급함과 피곤함이 아닌, 생동감. 그래서일까. 고흐展이 열리던 시립 미술관 한 쪽에 마련된 천경자 화가의 상설展[천경자의 혼]이 오히려 빛이 났다.
폴 ●이상한 나라의 폴,
요즘은 혹시 앨리스일지도 모른다며,
종종 토끼가 꿈에 나온다며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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