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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4월호 [기획-'오빠’의 세계]‘오빠’가 뭐길래?_달마
기획-'오빠’의 세계
‘오빠’가 뭐길래?
달마 ●
대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갓 들어온 새내기 여자후배들이 내 동기들에게 “오빠, 오빠”하는 모습을 내가 얼마나 가당찮고 또 어이없게 생각했던지, “오빠”라고 한번만 불러달라던 한 해 묵은 같은 과 동기의 장난질을 어떻게 간단히 무시했는지에 대해서도 굳이 말하지 않으려 했었다. 굳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이런 내 인생의 기조가 불가피하게 무너졌던 순간이 있었음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빠라는 말은 나에게 여전히 낯설고 간지럽다. 뿐만 아니라 오빠라는 호칭앞에서 좋아죽는 남자들을 볼라치면 그 장단에 흥을 맞춰주는 여자들이 밉살맞기까지 하다. 그러나. 징그러 죽겠어서 입에 담기 싫은 그 말을 내가 밥 먹듯이 해대던 때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빠의 시장선거를 도와야했던 바로 그 비굴모드 기간이었다.
2002년. 20대 중반을 갓 넘긴 나는 아빠의 선거캠프에서 정책 및 조직관리 업무를 맡았다. 조직 중에서도 특히 젊은 세대 조직을. 선거를 치러야할 동네는, 내가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중고등학교를 모두 타 지역에서 다닌 덕에 지금껏 연락이 닿는 친구들은 전혀 없었다. 그런 선거판에서 젊은 조직을 새로 만들고 꾸리려고 하니 당췌 좋은 방법이 없는 터, 지역에서 중고시절을 보낸 ‘오빠’들의 도움이 절실했다(‘언니’들은 선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선거사무실에서 만난 몇몇의 ‘오빠’를 시작으로 이 ‘오빠’들이 소개해준 지역에서 꽤 활동이 왕성한 다른 ‘오빠’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이 ‘오빠들’의 모임도 만들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지역모니터링 명목으로 만나 주제 토의도 하고 술도 먹는 그런 시간들이 이어졌다. 급박하게 굴러가는 선거판에서, 이 ‘오빠들’의 역할은 컸다. 학교 동창들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를 소개시켜 주었으며, 동창모임에서 내 아빠의 정책(오빠들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전했다. 지역 대학교 홈페이지 로그인 아이디를 빌려줬으며 단체메일 디자인은 물론 단체발송 프로그램도 짜줬다. 힘쓰는 일이 있을 땐 와서 도왔다. ‘오빠’는 친밀감 형성을 넘어 내 성(여성-여동생)을 십분 활용하는 유용한 도구였으며 오빠들은 여기에 순순히 응했다. 아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동네에서 이 정도의 성과는 가히 놀랄만한 것이다. 불과 한달만에 말이다.
가끔 돌이켜 생각해본다. 나 스스로 유용할 것이라 여겨 선택했던 전략적 호칭, “오빠”. 이 “오빠”가 과연 어떤 성과를 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다소 회의적이다. 가장 큰 결과 중 하나는 그 조직이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빠들’에게 여전히 내가 ‘여자-동생’인 이상 나의 영향력은 동생의 범위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한달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친해지는 데는 효과가 있었으나 그 친밀감은 상하위계(오빠-동생)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더 나아갈수도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는 데 있어 진지해질 수도 없다. 진지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성적인 관계로의 발전일 뿐. 연인 혹은 나에 대한 찝적댐?(실상 그렇기도 했다. 선거기간 동안 나는 그 오묘한 줄타기를 해야했다. 어떤 한명의 오빠에게만 집중하거나 관심을 표명해서는 안된다. 다른 모든 오빠들에게 여지를 주며 내 성을 팔며, 나는 이렇게 외쳤다. ‘선거야 선거야 빨리 빨리 끝나라…’) 그런 마당에 굳이 이 조직을 선거후에도 유지해서 지역의 젊은 조직으로 만들고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도록 만들고 관리하고픈 욕심이 나에게도 없었다. 나는 솔직히 ‘오빠’들과의 의견대립을 뚫고나갈 힘도, 의지도, 방법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오빠들 중에 살아남은 이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잔소리쟁이 내 남편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처음 그 둘이 어떤 관계였느냐가 제법 큰 영향을 미치는데, “오빠”로 처음 호칭을 시작한 탓에 남편은 지금도 오빠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결혼 후, 왜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오빠”라는 말을 당신을 만날 당시(선거운동 당시)에 남발할 수밖에 없었음에 대해 설명하고, 하여 호칭을 ‘남편’으로 분명히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때가 ‘그립다’고 징하게 우긴다. 삶의 파트너로서 당신과 나 사이에 나이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함을 이야기하고, 온전한 파트너십 구축을 위해 오히려 나이는 방해막임을 (그도) 알고있음에도 불구, 그는 나를 ‘미리야’라고 부르고 싶어하며 ‘오빠~’라고 부름당하고 싶어한다.
남편에 대한 호칭은 쉽게 정리가 되었지만 문제는, 그 때 당시 만난 ‘오빠들’에 대한 호칭이 변할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것. 만날 일이 거의 없지만 호칭을 바꿀 기회도 시간도 필요도 없던 탓에, 가끔 마주치기라도 할 땐 호칭을 ‘오빠’라고 해야하니 여간 어색하고 꺼림직한게 아니다(더욱이 그 ‘오빠들’에게서 내가 더 이상 꿰어낼 것이 없지 않던가).
처음 만날때의 호칭은 관계의 성격을 좌우한다. 호칭이 바뀌지 않는한 그들과 나의 일대일 파트너십을 만들기는 어렵다. 그들이 나의 ‘오빠’이고 내가 그들의 ‘여자 동생’인 한 말이다.
달마 ● 봄볕을 닮은 미소,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소리가 예쁜 민우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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