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4월호 [기획-'오빠’의 세계]‘오빠’ , 내 욕망이거나 아니거나_노재윤
기획 ‘오빠’의 세계
오색빛깔 찬란한(?) ‘오빠’의 세계
‘오빠’를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종다양한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마치 끝나지 않는 마법의 이야기 책을 손에 집어든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짧은 단어 하나에 무엇이 그리 많이 얽혀있기에 그럴까? 이번 기획에서는 ‘오빠’에 담겨진 성별적 권력관계와 불편함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하기’를 넘어, 그 안에 얽혀있는 욕망과 환상, 그리고 그 말과 닿아 있는 현실의 다양한 맥락을 풍부하게 드러내 보려 하였다. 자, 오색빛깔 찬란한(?) ‘오빠’의 세계로 함께 빠져보자.
‘오빠’ , 내 욕망이거나 아니거나
노재윤 ●
오빠라는 호칭에 대해 내가 느끼는 약간의 ‘불편함’이란, 관계 안에서 불필요하고 부당한 위계와 권력관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공자님 말씀을 먼저 써놓고 나서 좀 찜찜해졌다. 얼마 전의 기억이 불현 듯, 떠올랐다. 모 연예프로그램에서 배우 한예슬이 다양한 버전으로 “오빠”라는 말을 던졌을 때,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던 전국의 남성들은 뒤로 넘어갔다(고 한다). 침대에서 뒹굴대며 티비 채널을 돌리고 있던 나는 뒤로 넘어가는 대신, 티비 앞으로 쪼르르 뛰어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불편함은 개뿔. 사실 난, 오빠를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불러주는 그런 오빠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뭔가 좀 불편하다고 느껴야 정답이 아닐까 생각하는 내 머리와 오빠에 반응하며 뛰어나간 내 몸은 따로 노는 것 같다. 나는 오빠되기, 오빠라고 불리기, 그녀들의 오빠를 은연중에 욕망하고 있는 걸까? 그럴지도. 하지만 오빠를 욕망하는지 아닌지, 어떤 오빠가 되고 싶은지 잘 알 수 없는 나는 어중간하고 혼돈스럽다. 못 박고 시작하자면, 나는 오빠를 욕망하거나, 욕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오빠를 말해야 하지? 알다시피, 이 오빠는 친족관계 내에서 같은 항렬의 손위 남자 형제를 부르는 그 오빠로부터 중년 남성들의 성적 활기를 고양시키는 ‘업소’의 고객관리 전략까지, 두루뭉술한 범주와 다종다양한 맥락과 과잉스러운 의미를 가진다.
예컨대 ‘나쁘거나 좋은’오빠들이 있다. ‘오빠 믿지?’란 쌍팔년도 문장을 읊조리며 욕망에 헐떡이는 오빠, 말을 안 들으면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팰지도 모르는 예비 가부장으로서의 오빠. 친족관계 안의 동생이든 나이가 어린 애인이든, ‘오빠가 해줄께’라고 말하는 믿음직한 반려자, 보호받고 싶은 대상으로서의 그 오빠, 그러나 뭔가 개운한 느낌은 들지 않는 그 오빠들. 어떤 오빠가 됐든, 나이에 따른 성별 구분을 가볍게 넘어서는 동시에, 남성들의 다양한 환상과 욕망이 얽혀있는 호칭이라는게 공통적이다.
이제 막 안면을 튼 관계에서 “그냥 오빠라고 불러 ”라는 말은 관계형성의 욕망이다. 개인 간의 만남은 순식간에 나이와 성별이라는 권력이 동시에 작동하는 관계로 바뀐다. 별 생각 없이 오빠라고 부르는 순간, 별 생각 없는 반말로 화답받는 권력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남성들에게 오빠란 단순하게 나이와 성별에 따라 위계를 정하는 것 이상으로 기묘한 욕망의 부름이다. 누군가 내게 오빠라고 불러줄 때 느끼는 나긋함과 친밀함과 보호의 욕구, 정신적 보호라는 명목을 물리적 구속이라는 실질까지 밀어붙여도 어느 정도는 용인될 것 같은 그 사회적 부름.
오빠들은 이 말랑말랑해 보이는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동시에 섹슈얼한 욕망을 꿈꾼다. 이 욕망은 중립적으로 말해 상대를 잠재적인 이성애 연애대상으로, 악의적으로 말해 상대를 손쉬운 연애대상으로 전제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건조한 호칭인 ‘선배’보다는 가족관계의 친밀함을 빌려오는 오빠가 욕망을 실현하기 더 쉽다. 오빠 밥 사줘, 오빠 갑자기 술이 고프네, 오빠 나 저거 사줄 수 있어? 오빠 나 오늘 집에 들어가기 싫어…. 딱히 불우하지 않은 상대에게 오락과 편의를 일방적으로 제공하고 싶은 오빠들의 욕구는 여기서 생겨난다. 내가 보호자물주가 된다는 심적물적 부담감 이전에, 많은 남성들이 이런 환상, 또는 욕망의 단계별 종합선물세트를 쉽게 떨쳐버리기란 어렵다. 이 오빠는 자신의 보호와 배려 따위에 상응하는 ‘보상’을 기대한다. 나를 오빠라 부르는 너는 언젠가는 ‘틈’을 보여줄거지? ‘기회’를 줄거지? 그래서 오빠라고 불렀던 거 아냐?…. 연애중인 많은 오빠들이 ‘그냥 아는 선배’가 아니라 ‘그냥 아는 오빠’를 만났다는 그녀의 말에 분노하며 의처증 초기증세를 보이는 건 이런 맥락과 닿아있다. 그 오빠가 나 같은 오빠면 어떡하지?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럼 누나는 뭐야?…. 누나는 오빠와 성별만 뒤바뀐 호칭으로 생각되지만 누나에는 오빠와 같은 욕망의 전제들이 없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은 ‘누나’라고 부르던 연상의 여성과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호칭을 버린다. 성별화된 연애의 성격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오히려 한 노래 가사는 “너라고 부를게. 뭐라고 하지마”라며, 누나를 연애상대로 삼고 싶다면 상대의 의사와 관계없이 굳이 ‘너’라고 부르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일러주기도 한다. 누나라는 말은 같은 계열의 호칭이라도 실재하는 성별 권력관계를 반영한다는 걸 거꾸로 보여주는 셈이다.
사실 오빠는 권력이되, 상호교환의 논리가 교묘하게 얽혀있는 권력이다. 이 권력은 일방적이지 않다. 오빠라는 호칭 안에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면서 성별로 갈리는 관습적인 태도와 기대가 있고, 이 호칭을 놓고 남성과 여성은 각자의 욕망을 다양하게 투사한다. 불리는 이는 호명하는 쪽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줘야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오빠대접’과 ‘오빠노릇’의 상호 교환 관계. 이건 잘만 하면 공정한 게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물론 아니다. 게임의 룰은 애초에 오빠와 그 오빠의 아빠들이 만들었고, 게임은 그 안에서 하는 거다. 그래서 어떤 여성이 말하는 오빠는 오빠-아빠로 이어지는 문화권에 안락하게 정착하는 수단일 수도 있지만, 어떤 여성이 말하는 오빠는 의지와 상관없는 생존의 수단이기도 하고, 이 둘은 종종 겹쳐있다.
그러나 오빠들은 한편으로 자신의 권력에 상응하는 의무를 잘 알고 있다. 그 의무는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가부장이나 모성 이데올로기 속의 엄마처럼,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의무다. 어렸을 땐 허구한 날 야! 라고 부르던 동생이 결혼을 하고 어느날 갑자기 나를 오빠라고 부를 때, 선배라는 호칭에 익숙하던 그녀가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다가올 때, 밀려오는 애틋함과 왠지 모를 책임감. ‘오빠노릇’또는 ‘오빠다움’의 굴레는 그런 식으로 씌워지고, 그렇게 오빠는 스스로의 역할을 단순한 ‘손윗사람’이상으로 강화한다. 그래서인지 책임감이 출중한 많은 오빠들이 ‘나’라는 표현 대신 ‘오빠가…’라는 자의식 넘치는 표현을 쓰곤 한다(그리고 이 표현은 남성들의 세계에서 애틋하게 사용되는 ‘형이…’라는 표현과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이쯤에서 스스로 태클을 걸게 된다. 그런 오빠들의 맥락만 있는건 아니잖아? 나름대로 평등한 관계에서 무성적으로 사용되는 편의상의 호칭일 때도 있잖아?…. 물론 그렇다. 오빠는 그 자체로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정서와 논리, 그 진부한 권력관계를 이미 내포하고 있거나 여러 갈래로 강화하는데 유용한 호칭이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당신이 누군가를 오빠라고 부른다고 불평등한 성별관계를 터무니없이 묵인하거나 그에 안주하게 되는걸까? 당신이 오빠라고 불리길 기대한다고 그저 느끼한 마초인걸까? 호칭이 가지는 불평등한 맥락들과 실재하는 관계, 또는 정체성이 그렇게 단선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어떤 오빠들은 그 호칭으로 나눌 수 있는 다른 정서와 관계를 배제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이 호칭에, 나이주의나 성별 권력관계를 전제하는 욕망이 아니라, (그런게 있다고 치고)좀 더 긍정적인 욕망들이 투여될 수 있다면 어떨까? 너무 순진한가? 난 오빠가 가지는 함의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 달콤한 권력의 일부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걸까?…. 분명한건 오빠를 둘러싼 생각, 성찰, 고민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반응하는 오빠의 의미와 맥락을 드러내는 동시에 조금씩 탈각하게 만든다는거다. 물론 그 완전한 탈각은 오빠 밖의 다양한 권력관계들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개선되거나 전환될 때 가능하고, 그럴 때 오빠는, 역설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호칭이 된다. 그러니까 결론 없이,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말하자. 나는 당신에게 오빠를 욕망하는 동시에 욕망하지 않는다.
노재윤 ● 원고 질리게 늦게 써서 죄송합니다.
이게 다 노무 …아니 2MB 때문이지만,
올해는 이런 변명을 하지 않고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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