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4월호 [민우ing]모두에게 해피엔딩을 원하는가?-낙태에 대한 ‘다른’ 말하기_봉달
민우ing
모두에게 해피엔딩을 원하는가?
-낙태에 대한 ‘다른’ 말하기
여성건강팀 봉달 ●
나는 낙태를 한 적이 있는 여자들을 ‘꽤’ 알고 있다
가깝게는 엄마가 있고 친구도 있다. 친구의 친구, 후배의 친구처럼 누구누구의 아는 사람까지 치면 더 많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대개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특정 세대가 거쳐 온 시대의 단면이거나, 그렇고 그런 통속 소설의 줄거리로 말이다. 사실 ‘낙태’는 한순간의 일이 아니라 연속적인 사건의 과정이거나 결과이다. 한 줄의 문장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사정들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이야기들이 단순 분류되는 것은 왜일까? 그건 ‘낙태’가 이야기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에게 낙태는 밝히고 싶지 않은 ‘오점’이 된다. 믿을 수 있는 몇몇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숨겨야 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낙태는 다른 누군가가 전해주는 ‘소문’으로 접하게 되는 것이다. 간혹 낙태가 적극적으로 이야기될 때가 있기는 하다. 가족의 역사-5남매가 아니라 3남매가 된 사연-를 설명하거나, 누군가의 도덕성-결혼하자던 남자가 여성이 임신이 되자 연락을 끊었다는 사연-을 고발하려(또는 이를 통해 여성을 훈육하고자)할 때이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여성은 결코 화자가 될 수 없다. 누군가의 어머니나 ‘소문’ 속의 부도덕한 ‘여’주인공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당사자들이 말하면 낙태는 다른 ‘사건’이 된다
내가 듣는 낙태 이야기는 몇 마디로 단순 분류되는 것이지만, 그녀들에게 ‘낙태’는 구구절절한 사연이다. ‘낙태’는 불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성관계, 임신, 출산(이후 양육)이라는 일련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낙태는 그/녀(중요하게는 그녀)를 둘러싼 사회와 관습의 망에 의해 규정받는 행위이다. 하나만 낳자는 가족계획 시절에는 국가가 나서서 낙태를 지원했다. 지금은 출산장려 시대라지만 임신한 비혼 여성에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출산장려의 대상이 되는 결혼한 여성이라도 무작정 아이를 낳고 볼 수는 없다. ‘아이를 낳거나 키울 여건’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개인적인 사정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적인 기획, 임신 가능한 여성을 구분 짓는 범주, 양육을 위한 사회적인 환경이 그 여건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여성의 위치-임신과 출산 이후 직장생활이 가능한가, 비혼 여성의 출산이 인정받는가, 아이를 키우며 먹고 살 수 있는가 등-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누구도 낙태라는 사건을 원하지는 않는다, 단지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출산을 결심하는 것은 양육을 담당하게 될 여성 자신(때로 배우자나 가족)의 삶과 자라날 아이의 삶을 기획하는 일이다. 선택의 순간 삶을 규정하는 여건들이 우선 고려되는 것은 당연하다. 출산이 만들어 내는 삶의 모습(아이를 포함하여)을 상상해 볼 때, 그 삶을 살아내고 책임져야 하는 누군가에게는, 이는 평생의 생존권을 건 선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이 체감하는 ‘여건들’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때, 현실은 구구절절한 ‘사연’이 된다. 하지만 그런 ‘사연’은 늘 삭제되고, 잘못된 행위로 (규정된)낙태만 남는다. 행위자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함께.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는 현실은 어떤가? 낙태 경험자 중 42%는 비혼, 58%는 기혼이다. 비혼여성의 96%는 사회 경제적 이유(비혼이어서, 미성년자, 경제적 어려움 등), 기혼여성의 76.7%는 가족계획(자녀불원, 터울조절, 원하는 성별이 아님)때문에 낙태를 한다.
낙태가 벌어지는 현실 속에는, 연애와 성관계 등에서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갖기 어려운 여성의 현실이 있고 비혼여성의 임신에 대한 끔찍한 낙인이 있다. 기혼여성이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어떤 아이든 제대로 양육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은 미비하고, 천문학적인 양육비(교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 ‘남아선호’도 여전히 남아 있다. 현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도 변하지 않는다. 이는 낙태를 걱정하는 시선이 ‘여성’개인이 아니라 ‘사회’로 돌려져야 하는 이유이기도하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낙태는 불법이다
여성이 낙태를 하면, 몇몇 경우(성폭력, 건강상의 위험, 유전질환 등)를 제외하곤 처벌받도록 되어 있다. 현재 모자보건법에 의하면 그렇다. 한해 낙태 추정건수는 34만 건, 이중 4.4%만 합법적인 낙태. 법에 의한 금지규정이 만든 결과이다. 법대로 한다면 95. 6%의 여성과 그녀를 시술한 의사들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낙태로 처벌을 받는 경우는 극소수다. 낙태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자보건법은 여성의 낙태를 실질적으로 허용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존재함에도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여성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다. 낙태 허용이 낙태를 급증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어불성설이다. 누구에게나 낙태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일이고, 낙태 허용이 이러한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낙태 금지가 가져올 결과는 분명하다. 수많은 여성들을 불법 낙태의 희생자로 만들 뿐이다. 진심으로 낙태를 줄이기를 원한다면 ‘누구나 아이를 낳고 키울 여건’을 만드는 데 매진할 일이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면 어떨까?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비혼 여성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어떤 아이든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원치 않은 임신은 줄고 그만큼 선택의 순간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내용은 변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은 낙태를 말하는 화자와 그 내용을 달리 구성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임신, 낙태 혹은 출산이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평생의 삶을 좌우하는 일임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야기의 내용은 여성의 경험과 삶이 될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해피엔딩을 원한다면,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자기 몸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을 존중하는 것이 우선이다. 주인공이 바뀔 수 없다면 말이다.
봉달 ● 늘 행복을, 즐거움을, 출발을, 만남을 꿈꾸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꿈꾸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요즘의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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