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6월호 [평동 사무실에서]'식코'를 통해 다시보는 국민건강보험제도
평동사무실에서
‘식코’를 통해 다시보는 국민건강보험제도
김인숙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결정한 지인이 보험업을 시작했다는 말에 미루던 보험가입을 하기로 했다. 성인병으로 아이들에게 짐이나 되지 않을까 염려하던 차에 보장도 받고 지인의 새로운 출발을 도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하지만 가입이 거절되고 말았다. 고혈압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아니, 아픈 사람이 아플 때 치료를 보장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보험이 지금도 아니고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합병증을 우려해 가입을 거부하다니, 뭔가 이상했다. 크고 작게 보험회사로부터의 이런 거절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부사태가 그리 큰 문제는 아닐 수 있다. 최소한 우리에겐 보험증만 있으면 전 국민이 전국 어느 병원에서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보험은 국내 병의원, 약국, 보건소 등 모든 요양기관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당연지정제라는 항목으로 규제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민간의료보험과 달리 경제적 능력이나 그 외 여하한 이유로든 거부됨 없이 보장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논란에서 잠깐 벗어나긴 했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한 규제완화 차원으로 당연지정제 폐지가 거론된 적 있다. 당연지정제 폐지는 병원들이 일부 부유층을 진료 대상으로 고급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건강보험으로 보장받는 돈 안 되는 환자는 거절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윤 추구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급병원에서 질 높은 치료를 받게 될 부유층이 고급서비스를 보장해주지 않는 건강보험에서 이탈해 민간의료보험으로 이동하려 할 것이다. 건강보험의 재원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소득층의 이탈이 가뜩이나 열악한 건강보험재정을 약화시킬 것은 뻔한 일이고 저소득층의 건강권은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당연지정제 폐지안은 국민들의 부정적 여론 덕에 자취를 감춘 듯하다. 하지만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라는 새로운 수단으로 국민의 기초적 의료문제를 시장에 내몰까 염려스러워진다. 2007년 8월 현재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62-65%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35% 정도가 자부담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는 법정 본인부담과 함께 비급여 본인부담영역이 넓기 때문이다. 병원들은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국민건강보험에 포함되지 않는 비급여영역을 늘림으로써 병원들이 받고 싶은 가격대로 가격을 조절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를 늘리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고가의 의료서비스를 감당키 위해 민영의료보험을 활성화시킬 공산이 크다. 국민건강보험 지급률은 110% 정도이다. 즉 100원을 내고 110만큼의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수입대비 지출이 많은 구조이다. 이에 반해 민간보험의 지급률은 60% 선이라 한다. 즉 100원을 내면 60만큼만 보장된다는 것이다. 40이 회사의 영리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 고혈압이라는 이유로 거절된 나의 경우가 시장원리로 접근하는 민간의료보험이면 경영논리상 당연한 선택이다. 2MB는 100을 받아 110의 혜택을 주는 제도를 선택할 지, 100을 받아 60의 혜택을 줄 제도를 키울 것인지 누구의 입장에서 결정하게 될지 걱정스럽다.
국민의 건강을 사적보험제도로 풀고 있는 나라인 미국의 한심스런 예는 다큐영화 ‘식코’를 보면 알 수 있다. 국가의료보험제도는 없고(공무원, 군인 그리고 극빈자만 보장) 일반인은 사적으로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의료보장도 받지 못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보게 된다. 잘린 손가락 두 개를 놓고 수술비가 싼 손가락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고, 찢어진 무릎을 자신이 꿰매야 하는 현실, 보험회사의 진료비 지불거부로 죽을 수밖에 없던 암환자의 이야기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함과 동시에 국가보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자랑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이런 미국의 생활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영국에서 몇 년 살았던 경험이 있다. 영국은 전국민 무상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덕에 거주하는 동안 넉넉지 못한 생활비에 마음을 졸이고 살았어도 아이들이 아파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큰 아이 송곳니를 제거해야 하는 때도 성인이 되어 필요시 꺼내 사용할 수 있도록 잇몸에 넣어 보관하는 수술을 제공했다. 물론 입원과 수술 모두 무료로. 소아혈액암으로 치료 중에 부모를 따라왔던 이웃집 6살의 원제는 병이 있다는 이유로 입국이 거절되지 않았으며 극진히 치료를 받고 말짱하게 나아서 지금은 고3의 씩씩한 청년이 되어 있다. 주치의가 부모보다 먼저 약속 날짜를 챙겨 연락하며 재발여부를 체크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자국민이 아닌 이방인(세금 한푼 안 내는)에게 까지도 동일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세계적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이런 NHS (National Health Service)는 나라가 돈이 남아돌 때 시작한 것이 아니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공공 시스템의 틀을 크게 흔들었던 철의 여인 대처총리 시대, 철도, 통신, 전기 등 기간산업까지 민영화를 추진하던 시대에 조차 이 NHS시스템은 지켜졌다고 한다. 누구를 위한 정부요 정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 당시 정치인의 철학이 궁금해진다.
소득양극화 현상에 대한 우려들이 높다. 소득양극화가 건강의 양극화로 이어질까 더 염려스럽다. 그러나 이미 조사 자료에 의하면 부자일수록 건강하고 가난할수록 질병 발생률이 높다. 가난하면 암에 더 잘 걸리고 암에 의한 사망률도 높다. 사망률도 마찬가지다. 소득이 건강을 좌우하는 이런 현상을 방치하고 더 심화시키길 우리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경제활성화로 잘 사는 나라를 만든다는 말에 동의하는 국민이라도 잘사는 사람만 건강하게 사는 나라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2MB가 발표한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라는 정책으로 사적보험을 키우고, 그것에 국민의 건강을 맡길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재원을 좀 더 마련하기 위한 확고한 의지와 비급여항목을 줄여가려는 정부의 정책적 개입을 기대한다. 우리는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정책이 추진되지 않도록 지켜볼 일이다.
김인숙 ●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