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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5*6월호 [국제통신원]다시 그리운 쌍문동 생협 공동체(2)
국제통신원
다시 그리운 쌍문동 생협 공동체(2)
김종애, 윤희경, 이경미 그리고 김인숙 선생님에게
김금미
이번 호에 실린 ‘국제 통신원’은 지난 호의‘캐나다에서 온 편지’에 이어 쓴 편지 글의 뒷부분입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편견과 차별에 대해서 말했었죠. 나름대로 열린 마음으로 살아왔노라고 자부하던 저도 이 곳 캐나다 생활에서 종종 내뱉는 제 말 속에서 저 자신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발견하면서 깜짝깜짝 놀라곤 한답니다. 인종차별주의에 치를 떨면서도 저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닌가 자문할 때가 있죠. 제 딸 아이는 저더러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고 줄곧 놀리곤 해요. 가령, 어떤 한 외국인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그 나라 전체에 대한 고정 관념으로 발전시키는 것 같은 멍청한 짓을 한다는 거지요. 이 같은 고정 관념을 깨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구체적인 만남을 통한 사고의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더 잘 이해하고 서로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듯이, 국제 사회에서도 똑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지요.
저의 비좁은 시야를 넓혀준 귀인을 이 곳 캐나다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겐 무척이나 큰 행운이었습니다. 제가 영어 학교에 있을 때 만난 인도 출신의 ‘쉴라’라는 선생님이 그 분이십니다. 제가 그 분에게 배울 때가 선생님께서 은퇴하시기 전의 마지막 클래스였는데, 65세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헌신적으로 자투리 시간까지도 아껴가면서 학생들을 정말 사랑으로 가르치신 그 분의 모습은 이상적인 ‘스승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단지 극성스럽게 가르치려고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분석력과 삶에 대한 깊은 혜안을 두루 갖추고 완벽한 영어 실력으로 학생들을 압도하면서 끝임없는 자극과 격려로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시려 무진 애를 쓰셨죠.
대부분이 초기 이민자들로 정착하는 데 이런 저런 애로를 안고 있던 학생들은 그분의 따뜻한 배려와 엄격한 가르침에 힘입어 나름대로 자신의 진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어요. 그분은 우리들에게 단지 경쟁에서 이기라고만 인도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여러 가지 이슈, 가령 악덕 기업이나 다국적 기업의 문제점, 혹은 시사와 관련된 쟁점을 가지고 학생들로 하여금 토론하게 하시곤 했죠. 그 과정에서, 다들 나이가 들어 굳어질 대로 굳어진 우리들의 사고 방식을 흔들어 비판적인 시각을 일깨우시곤 했답니다. 저에겐 참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물론 제 시야가 훨씬 더 넓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 선생님의 철학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었고 그 사랑의 실천을 일상을 통해 손수 보여주셨습니다. 골관절염으로 퉁퉁 붓고 아픈 다리를 끌고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이나 층계를 오르내리며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은 자료를 주시려 복사실을 들락거리시던 그 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쉴라’ 선생님을 통해 본 인도라는 나라와 국민은 정말 따뜻하고 포용력 있는 특성을 전해줍니다. 그 느낌은 제가 캐나다에 오기 전에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어렴풋이 가졌던 감미로운 환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제가 캐나다로 이민 온 뒤, 여러 인도인이나 파키스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문화, 특히 음식 문화를 알게 되면서 가졌던 저의 오만한 편견과는 확연히 정반대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고 저의 좁은 소견이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에요. 아직도 지독한 카레 냄새나 무례한 인도인들을 볼 때면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곤 하지만 한 사람과의 구체적인 만남을 통해 다져진 제 마음은 이전처럼 그렇게 딱딱하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이 제가 저 자신에 대해 갖는 희망이죠. 아직도 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여력이 내 안에 있음을 확신할 때,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삶의 기쁨입니다.
김금미 ● 지천명의 나이에 자문해 본다. 너는 하늘의 뜻을 알고 순리를 거스르지 않으려 하느냐고.
가끔은 객기도 부려보지만 이전과는 다르다. 하지만 적어도 ‘마음의 평화’라는 말의 참뜻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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