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8월호 [회원 이야기] 나를 찾아 떠난 여행
조연주(벼리)
작년 5월은 몸과 감정, 꿈을 통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첫 달이었다.
그즈음 나는 하던 일이 잘 안 되어 스트레스와 짜증이 쌓이고 나중에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솟고 남편에게 화를 폭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찌 할 줄은 모르고 막연히 심리상담을 받고 싶다고 생각만 하며 몇 년을 지내던 와중이었다. 심리상담을 공부하는 친한 언니한테서 상담 받을 교수님을 소개받기는 했지만, 많은 대한민국의 주부들처럼 나를 위한 투자에는 망설여져, 한 번에 10만원이나 하는 상담을 시작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몸을 통해 이상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년 5월 중순, 이사를 준비하는 중에 몸이 너무 피곤하여, 집 정리하다 잠이 쏟아져 초저녁에 쓰러져 자기도 하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밤잠이 없는 전형적인 올빼미 형이라, 이런 증세가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그땐 이사 때문에 피곤해서려니 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사를 마치고도 피곤한 증세는 계속되어, 일을 시작하는 것도 미루어야 했다.
그러던 중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를 읽게 되었다. 글을 읽다 눈물이 나거나 몸이 아프거나 졸리는 등 감정이나 몸의 신호가 오면 잠시 책을 멈추고 집중해보라는 구절이 있어, 어느 대목에선가 피곤이 밀려와 잠시 누웠는데, 그 날이 열흘 가까이 누워있게 되는 첫날이 될 줄은 몰랐다.(기운 없이 빙빙 돌며 어지러운 것이 예전 초기 생리통 증상과 비슷해, 나중에 난 이것을 ‘자궁이 날 당겼다’고 얘기한다. 우연히 그리 된 것일 수도, 완경주변기라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었겠지만…)
동네 가정의학과에서 가능한 검사는 다 했지만 원인을 찾지는 못했고, 며칠 후, 여성의 전화에서 일했고 지금은 심리학공부를 하는 언니에게 이런 얘기를 하게 되었다. 뭔가 심상찮다고 언니가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어보라 해서, 그 자리에서 서점으로 달려가 읽게 되었다. 몇 년 전 처음 읽었을 때는 뭔가 신비주의적이고 황당해서 다시 볼 책은 아니라 생각했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그 책을 다시 읽곤, ‘그래, 나도 나의 보물을 한 번 찾아보자’라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대망의(!)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의 시작이 된 것이다. 여성학, 심리학 책을 읽으며, 심리상담도 받기 시작했고, 땡빚을 내서(!) 작년 12월, 3개월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혼자 떠났다. 첫 도착지였던 이탈리아에서 보름 여행을 마치고, 스위스 인터라켄으로 기차를 타고 가던 중에는 우연히 앞자리에 앉은 캐나다인 중년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심리상담을 받는 중에 틱낫한 스님이 계시는 프랑스 보르도의 플럼빌리지에 가보고 싶어 여행을 떠나왔다고 했고, 몇 마디 오가지 않았는데, 그분 남편이 영적인 수련을 하시는 분이란 얘기를 하셨다. 내가 대뜸, 하루 종일 궁금하게 여기던 전날 꾼 꿈에 대해 얘기했더니, 듣자마자 “당신의 내면아이를 돌보고 있는 거네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여행 떠나기 전, 책 읽으며 혼자 작업하던 게 ‘내면 아이 돌보기’였다.) 깜짝 놀라, 알코올 중독인 폭력 아버지를 가진 내 가족 배경과 상처에 대해 얘기했더니, 나의 영(spirit)이 나의 부모님과 가족을 선택했고, 세상사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며, 우주와 만물은 하나라는, 한국에선 거의 귀담아 들은 적이 없는 불교의 기본 개념이랄까 영적인 얘기를 해주셨다. 한 시간 남짓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난 결국 눈물을 보이며 울었고, 그녀는 ‘우리가 만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몇 번이나 강조하며 떠나갔다. 여행 내내, 이런 특별한 만남들이 여러 번 있었다.
플럼빌리지에서 지낸 3주 동안 틱낫한 스님 말씀도 듣고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수행 중에도 좋은 인연들을 만나, 즐겁게 지내는 데에도, 영적인 여행을 하는 데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난 이상하게 히딩크의 나라 홀란드의 여자 친구들과 친했고, 특히, 미국에서 온 인권운동 활동가 캐롤라인 할머니는 역할극을 통해 내 꿈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시기도 하며 날 여러 번 울리셨다. 생각나는 꿈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사랑하라는 메시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여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특히 그러하라는 것이었다.
파리에서는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실비 빠르땅의 앨범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70년대 말에 유행했던 그녀의 음반이 있었는데,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오빠가 예쁘게 생긴 그녀의 노래를 좋아해서 그 음반을 사와 들으며 자주 흥얼거렸었고 나도 방에 처박혀 혼자 듣기를 좋아했다. 7살 차이에다 장남인 오빠를 막내삼촌쯤으로 여겼던 나는 어릴 적에 오빠를 어려워했다(아시다시피 보수적인 집에서 장남은 ‘집안의 기둥’이자 아버지 다음 서열이다). 내가 대학을 선택할 때, 오빠는 “서울대, 연대, 고대 아니면 ‘가시나’가 서울로 대학 못 간다”고 으름장을 놓았고(나는 대구 출신이다), 평소 아버지는 대학까지만 시키면 그만이니 그 후로는 우리더러 알아서 살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간호대를 선택해 서울로 진학했다. 2년 후, ‘머시마’인 동생은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수하러’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다. 학생운동에, 졸업 후 단체 상근활동하는 날 불러 오빠는 또 뭐라 했고, 그 후로 난 오빠와 눈 마주치며 얘기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데면데면하게 지내왔다.
파리에서 만난 그녀의 앨범들은, 우울했던 나의 10대 때와의 만남이자 오빠와의 만남이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난 왠지 그 때 그 음반을 꼭 찾아야 할 것 같았고, 관광은 제쳐두고 여러 레코드점들을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실패했다(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한국에서 낸 기획음반이었다). 그러다 샹젤리제거리에 FNAC이라는 큰 레코드 상점이 있었던 걸 기억하고 또 다시 샅샅이 뒤졌는데 역시 그 음반은 찾을 수 없었다. 실망하며 계단을 올라와, 입구에서 고개를 돌린 순간, 내 등 뒤에서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며칠 후면 공연이 있을 거라는 광고문구와 함께 한 장의 포스터 안에서.
난 그녀의 공연을 보았고, 한국에 돌아와 그녀의 슬픈 노래들을 수백 번 들으며 눈이 퉁퉁 붓도록 엄청 울었으며, 지금은 오빠와 눈 마주치고 얘기하며 잘 지내고 있다.
지금도 (땡)빚을 내 심리상담을 받고 있는데, (땡빚이라는 말이 재밌어서리... 알고 보믄 심각하지만서도) 감정이나 생각이 그 자리에서, 혹은 장기적으로 몸의 감각, 통증으로 나타나는 것에 민감해지고 있다. 상담 중에, 몇 년 동안 있어왔던 팔의 통증이 없어지기도 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말이나 생각에는 오른쪽 어깻죽지에, 머리 아픈 얘기에는 오른쪽 눈 위 머리에 날카롭게 통증이 오며, 또 아랫배, 허리 쪽이 수시로 아프고 쿡쿡 쑤시기도 한다.
감정적으로 다시 겪으라는 뜻인지 어린 시절의 상처가 공포영화같이 변형된 꿈으로 나타나서, 잠을 깨어 무서움에 떨기도 한다. 어떤 날은 꿈에서 깨는 순간 어릴 적 불렀던 노래가 입에서 나오며 울음이 터졌는데, 우는 중에 기억난 어릴 적 장면이 바로 그 노래가 유행하던 시점의 일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기도 했다.(이런 일은 나만, 아니면 소수의 이상한 사람들이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죠?)
꿈도 해석하고, 감정도 조금은 더 드러내며 알아차리려 노력하지만, 꿈도 몸도 감정도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처음엔 행복했고, 중간에는 공격성과 우울함이 더 드러나기도 했는데, 어쨌거나 지금도 나를 찾는 여행은 계속 되고 있다. 아니, 평생 계속 될 것이다.
조연주(벼리) ● 아버지의 기대와 다르게 간호학으로 먹고 산 적은 없음.
의료보장운동, 탁아운동, 노동과건강운동단체 상근자로 일하다 사교육계에서 아이들을 가르침. 지금은 집에서 가사일을 조금만 돌보며 민우회 타로짱 모임과 40대 모임등을 하고 있음. 또다시 땡빚을 내어 일을 벌일지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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