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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7*8월호 [평동 사무실에서] 마지막 평동의 추억
박봉
기억력도 안 좋은 내가 왜 자꾸 기억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나 모르겠다. 늙었나 보다. 평동의 동평빌딩. 이 말장난 같은 곳으로 오게 된 게 1999년이었나… 5년여에 걸친 장충동시대를 마감하고 온갖 자료와 사무기기를 며칠에 걸쳐 이 곳, 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제 평동의 10여년 생활을 끝내고 성산동시대로 10월이면 접어들게 된다.
10여년의 세월이다 보니, 집 근처에서는 인사 나누는 아는 이웃 하나 없건만, 사무실 동네에선 어찌나 아는 이웃이 많은지 길을 걷다보면 꼭 한두 사람과 인사하게 될 정도다. 그래서인지 떠난다는 생각이 들면 왠지 섭섭하다.
사실 처음 이사 올 땐 웬 산골짜기냐 싶었다. 그런데 막상 딴 곳으로 움직이려니 여기만 한 곳이 없는 거 같다. 온갖 대형 집회와 다양한 종류의 토론회는 광화문 아니면 종로에서 열리기가 일쑤니 전부 걸어서 소화가능한 데다가(단점이기도 하다. 가깝다는 이유로 동원되기 쉽고, 불참이 어렵다는..--;;) 영화니 연극이니 하는 문화향유의 공간도 주변에 널려 있으며(실제로 누리고 살았느냐는 별개 문제지만), 중심지에 있다 보니 회원들이 어느 동네에 살건 대략 공평한 거리이고, 무엇보다도 싸고 맛있는 구내식당을 가진 서울교육청이 코앞에 있는 것은 사실 우리의 큰 자랑거리였다.
상근자들이 두 눈 벌겋게 뜨고 있는 대낮에 도둑을 맞아 경찰이 와서 수사를 하기도 했다는 비밀 이야기도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사실 10년은 짧지 않은 세월이다. 도둑만 맞았을까, 건물 엘리베이터에 갇힌 상근자와 회원 구하러 119도 몇 번 출동했고, 비가 줄줄 새는 5층 때문에 화재의 위험이 커 누전 점검 차 전력공사가 출동하기도 했다. 민우회가 이 곳에 들어온 지 10년쯤 됐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 4층 창에 붙어 있는 한국여성민우회의 ‘양재튼튼체’. 10년쯤 전에 대유행하던 글씨체다.
동평빌딩 지하는 가수들의 녹음스튜디오이다. 덕분에 전성기의 핑클과 클릭비와 젝스키스의 면면을 보기도 했다. 건물에 그들의 팬들이 써놓은 낙서를 읽으며 킥킥거렸다. 특히 우리 옆에서 삼겹살 먹던 어여쁜 청년들이 얼마 뒤 TV에서 ‘클릭비’라는 이름으로 데뷔했을 때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민우회는 평동으로 와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회원들의 사랑받는 뒤풀이 장소 ‘비어브로이’, 치킨뱅이의 전신이자 비데화장실로 회원들에게 황홀감을 준 ‘R.G.’, 어느 날 갑자기 폐업하고 사라져 우리를 슬프게 한 ‘먹을래, 싸갈래’. 수많은 분식집과 술집이 우리를 지나쳐갔고 우리를 맞이했다.
다른 친구도 있다. ‘수진이’. 그런데 이 친구는 모습을 보여주길 꺼려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는데 아무도 없다거나, 밤에 혼자 일하는데 건너편에서 자판소리가 들린다거나 하면 우린 반갑게 인사한다. ‘수진이 왔니~?’. 누가 언제부터 이 모습 없는 친구에게 ‘수진’이란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동평빌딩의 많은 사연을 몰래 품고 있는 곳은 사실 ‘옥상’이다. 사무실에서 누군가 울먹이며 뛰쳐나간다 싶으면, 둘이서 목청껏 소리 높여 싸우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싶으면, ‘옥상 행’이다. 울고, 싸울 때만 찾는 건 아니다. 사무실이 답답할 때면 그 곳에서 춤을 추기도, 소리를 지르기도, 하늘을 보기도, 혼자 잠시 자신을 내버려두기도 했던 곳. 그래서 아마 옥상은 좀 힘들었을 거다.
뭐니뭐니 해도 평동의 추억앙꼬는 평동사무실을 거쳐간 수많은 상근자들이 아닐까 싶다. 인숙, 정민, 승림, 신지, 김정민, 아기곰, 둥둥, 여유, 서소, 창연, 사자, 형태, 신나, 은미, 바다, 정아, 영지, 지현, 윤박경, 명진숙, 늘바람, 원사, 허브, 조정하, 따사… (이름 빠졌다고 섭섭해 하기 없기) 이름을 이렇게 한꺼번에 부르니 의외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랑했나 보다.
이름을 다 꼽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상근자들, 그리고 회원들, 열정적이어서 아름다웠던 그 여성주의자들이 이 곳에서 함께 꿈을 그렸다.
민우회 역사 20년 중 10년을 보낸 곳. 그리고 내가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30대를 몽땅 보낸 곳. 그곳을 떠난다. 오는 8월부터 1년간 안식년을 보내게 된 나는 이제 내년 8월, 새로운 활동을 성산동에서 시작할 것이다. 평동, 안녕~.
박봉 ● ‘마지막’은 ‘새로운 시작’의 다른 말임을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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