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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10월호 [세계 차 없는 날 기념] 걸어서 여행하기
다라
여행 _ 시작
상담소 너굴의 다크써클이 점점 짙어지며 왠지 모를 권태로운 빛을 띠어 가던 어느 날, 그녀가 선언했다. “나, 도보여행 갈꺼야!”라고. 소시적 참가했던 국토대장정에서의 추억이 마음에 한아름 남아있는 나는 대뜸 껴들었다. “나도 갈래!” 그렇게 시작된 가을 걷기 여행 팀. 그런데 이를 어쩐댜, 그 구성원이 민우회 삼실의 최강 게으름뱅이들이었던 것이다. 이 둘이 걷기 여행을 간다 하니, 이들이 걷기는커녕 서울을 뜰 수나 있겠냐며 팀 내외부에서 불신이 가득했다.
그 와중에 그 혼란을 수습하고 걷기 여행 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켜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상담소의 달 국장(달개비)님이시다. 달개비가 재미있을 것 같다며 합류를 선언하고 나자, 드디어 뭔가 할 수 있는(!) 팀이 만들어진 것 같았고, 우리는 차근차근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바쁜 업무 와중에 틈틈이 회의를 하고 역할을 나누어 진행하였는데 나와 너굴이 번갈아 가며 회의를 까먹거나 준비를 안 해 와 미뤄지기가 수차례. 이런 팀 내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달 국장의 영도 하에, 9월 10일 저녁 우리는 무사히 전주행 기차에 올랐다.
배낭
우리 여행은 4박5일로 섬진강을 따라 걷는 것이었는데, 비용과 여행에 대한 철학(정말?ㅋ)의 문제로 밥은 되도록 해 먹기로 했다. 덕분에 늘어난 것은 커다란 짐. 우리의 배낭은 4박5일간의 생필품과 여러 가지 식품으로 가득 찼다. 달개비는 이번 여행을 위해 특별히 엄홍길 대장(에베레스트, 히말라야 등을 등반한 유명 산악인)이 사용했다는 배낭을 마련해서 엄청난 양의 짐을 소화했다. 팀원들은 감탄하며 달개비를 대장님으로 추대, 이름하여 ‘달대장’이 되었다.
무겁고 커다란 배낭은 걸을 때 힘이 드는 주요 요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가방을 메고 걷다보면, 내가 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생필품을 내 몸 하나에 다 짊어지고 이동할 능력이 있는 ‘생물체’라는 것, 그것이 왠지 내게 자신감과 안도감을 주는 느낌이다. 무거운 짐을 얹고서 햇볕에 그을린 채 묵묵히 땅을 딛고 있는 나의 까무잡잡한 종아리가 참 흡족하고 사랑스러워, 자꾸 쳐다보고 혼자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에 얼마나 걸었는지는 비밀이다.)
길
국도, 강둑길, 논길 등 여러 가지 길을 걸으며 만났다. 국도는 차 이외의 생물들에겐 무조건 위험해 보였다. 뱀, 너구리, 다람쥐… 로드킬을 당한 동물들도 여럿 만났다. 우리가 걸어야 하는 마지막 차선의 하얀 선 바깥 공간은 넓어야 50, 60cm 정도의 공간 밖에 남아 있지 않고, 이마저도 종종 줄어들곤 했다. 이렇게 ‘도로’란 게 자동차만의 것인 게 당연한 건가? 그치만 자전거로 여행하는 것 같은 이들도 있었는걸. 차 이외의 경우도 배려된 도로라면 더 많이들 자전거를 타고, 걷고 그럴텐데.
길을 걷다가 마을과 만나면 꼭 하나씩 있던 정자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며 탁 트인 사방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오는 널찍한 정자에 양말 벗고 드러누워 하드 하나 입에 물고 있자면, 마치 이 순간을 위해서 힘들게 걸어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크~좋구나!’를 연발하며 우리는 급속히 정자 매니아가 되어갔다.
밥
몸을 많이 움직이면 밥이 맛있다. 걷다가 먹는 점심은 매일매일 내게 제일 즐거운 이벤트였다! 코펠과 버너를 가지고 다니면서 밥을 지어먹는 것은 생각보다 전혀 번거롭지 않았다. 오히려 여행지가 일상생활 공간으로 바뀌는 것 같은 그 느낌이 좋았다. 마을 보건소의 등나무 아래 테이블에서, 정자에서, 강변에서, 밥상을 펼치면, 지금껏 지나쳐가던 하늘과 바람과 햇빛이 모두 ‘내 공간’이 되어 옆에 머물렀다.
먹는 걸 주제로는 또 엄청 행복한 경험이 있다. 오후 쯤 지친 상태로 마을을 지나가는데 길가에 있는 감나무에서 홍시가 바닥에 떨어져 터져서 길목에 홍시냄새가 향긋했다. 서울서는 돈 주고 사야지만 먹을 수 있는 홍시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져 있다니…. 바알간 과육이 벌어져 있는 것이 참으로 맛있어 보였다. 군침을 삼키며 지나가는 중 개중에 멀쩡해 보이는 것이 있어서 아까워하다가…… 주워 먹었다! 크! 피곤이 가시는 구나! 그날 오후의 걷는 길은 감 따먹고, 밤 줍느라 열심이었다. 익은 것이 많지 않아 아쉬웠지만 주울 게 많았으면 그날 숙소에 도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 되 정도 주운 밤은 삶아서 다음날 간식으로 먹었다. 나무는 정말 좋구나! 참으로 사랑스런 생물이다! 마당있는 집을 사서 기필코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를 심어야지!
여행 _ 끝
사실, 어쩔 수 없는 도시인인 우리에게 땀투성이가 된 몸, 무성한 수풀과 쨍쨍한 햇볕은 많이 힘들기도 했다. 다행히도 ‘극기’나 ‘목표달성’ 같은 거엔 별 관심 없는 인간들끼리라 힘들면 버스도 타고 한참 쉬기도 하고 그랬다. 마지막 날 함께 걸으러 온 하나짱(상담소 활동가)은, 마지막이라 한껏 늘어진 우리와의 하루를 보낸 후, 아리송한 얼굴로 ‘나, 와서 뭐 한 건지 잘 모르겠어.’라고 말해 폭소를 일으켰다. 뭔가… 우리 여행의 핵심을 찔렀달까? 푸하하.
다라●차가 없는 다정하고 안전한 흙길과, 걸으면서 만나는 바람, 깨끗한 하늘, 걷는 이들을 반기는 조용하고 한가로운 의자와 정자들. 내 일상으로 자주자주 끌어오고 싶은 풍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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