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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10월호 [평동 사무실에서] 9월, 평동에서 전해 들은 돈암동 이야기
9월, 평동에서 전해 들은 돈암동 이야기
성신여대 학교환경미화 노동자 아주머니들의 싸움
바람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대충 씻고, 대충 밥을 먹고 대문을 박차고 나온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오른다. 아침이면 햇살이 가득하게 채워지는 평동 언덕길. ‘아, 이제 이렇게 이 언덕길을 오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종종 같은 타이밍에 출근하는 민우회 상근자를 만난다. ‘써프라이즈 선물’로 모닝커피를 한 잔 더 사서 그날 처음으로 만난 사람에게 여름날 아이스커피를 선물하는 하나, 저 멀리 언덕길 반대편 길쭉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오이, 평동건물 앞에서 수줍게 인사하는 락소년. 아침 평동 그 언덕길에서 나는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평동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이틀에 한 번씩 꼭 만나는 사람이 있다. 출근하는 시간 평동, 동평빌딩을 계단을 대걸레로 닦으시는 할머니. 할머니와 친해질 요량으로 매일 아침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지만 분위기가 쌩-하다. 평동, 동평빌딩 할머니는 참 시크하시다. 하루에 한 번 할머니를 그렇게 만난다.
미스터리한 건물, 동평빌딩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 아침, 민우회 사무실 청소하는 날. 이 날은 한주 동안 묵혀두었던 폐지 몇 상자와 꽤 많은 양의 재활용 및 각종 쓰레기가 민우회 4층 복도에 덩그러니 자리를 잡는다. 민우회 4층 화장실은 여성전용 화장실로 또 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간이기에 화장실 쓰레기통 쓰레기 또한 많이 쌓여나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뚝딱, 미스터리한 건물, 동평빌딩은 한 순간에 샤르륵 깔끔해진다. 유령이 살고 있나? 이런 기억이 과거에도 또 한번 있었다. 내가 지내고 있는 공간에 혹시 유령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 적이.
2004년, 학교에서 유령을 만나다
대학 시절을 보낸 나의 학교는 지금의 동평빌딩처럼 늘 깨끗했다. 화장실 휴지통은 바로바로 비워져 있었고, 학생들이 강의실에 남겨둔 각종 폐지와 빈 음료수병은 마치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있었는데…. 유령이 살고 있나?’ 학교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동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새벽 6시 30분에 출근해서 4시 30분까지 노동하는 환경미화노동자 아주머니들. 2004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던 그녀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십여 년이 넘도록 일한 곳에서 자신이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때 알게 되었다. 본인이 성신여자대학교에 직접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어떤 용역업체의 직원이라는 사실을. 그때부터 그녀들은 분주해지기 시작했고 말로 표현 못할 울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녀들은 우르르 총학생회실로 찾아왔다. “아이구, 학생들 내 말 좀 들어보아.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평생 일한 곳인데 나보고 이제 나가래. 어쩌면 좋아.” “한 사람이 청소를 해야 하는 구역이 몇 백평인지 몰러. 건물이 하나 둘 새로 생길 때 마다 일하는 사람 수는 그대로인데 청소해야하는 구역은 점점 늘어나고…에휴.” “밥해먹는 냄새가 학교 안에 퍼지면 역하다고, 밥 먹는 것도 눈치 보면서 먹었어.” “내 몸이 뚱뚱해 미관상 보기 안 좋다고, 학생들 없는 시간에만 나와서 일했지.” 미약한 시작이었지만 우리에게 말을 시작하면서, 참아왔던 감정을 쏟아내면서, 그녀들은 내 직장을 절대로 나갈 수 없다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7년 9월, 그녀들은 당당히 일 할 권리를 위하여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월 임금을 71만에서 79만원으로 높였다. 2007년 그녀들은 법정 최저임금(2007년 법정 최저 임금은 한 달 78만6천480원이었다.)보다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봤자 고작 몇 천원 더 많은 것이었지만 그녀들은 억울함과 분노로만 그치지 않고 당당하게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채 일년도 되지 않아 아주머니들은 다시 한 번 지역광고지에 실린 학교환경미화 노동자를 새로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자신의 해고 소식을 알게 된다.
2008년, 유령이기를 거부하며 당당히 존재를 드러내다!
이제 더 이상 그녀들은 무작정 분노하거나, 무작정 분주해하지 않는다. 용역업체를 선정하는 학교를 상대로 면담을 요청하고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녀들의 싸움에 함께하기를, 지긋지긋한 비정규직의 삶을 조금씩 지워나가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환경미화 노동자 아주머니들은 9,000명의 학생 중 6,500명이 넘는 학생들의 지지서명을 받았고, 신문이며 뉴스 등 곳곳에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전하였다. 집에서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다가 학교소식을 담은 기사를 보았다. 스크롤바를 쭉 내리다 마지막 사진에서 아침 인사를 매일 나누던 학생회관 원씨 아주머니가 조합원 수첩을 손에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학교를 떠난 내가 아주머니들의 싸움에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지.’ 그렇게 밤을 보냈다. ‘원씨 아주머니, 여전히 그곳에 계시구나. 매일 차가운 학교 시멘트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계시겠구나.’ 14일을 싸웠다. 매일 새벽 6시에 대체인력이 투입되는 것이 막기 위해 집회를 하고, 매일 저녁 7시 잘 싸워나가는 서로를 칭찬하는 집회로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2008년 9월 10일 늦은 밤, 희소식이 전해지다!
9월 3일 집중집회현장을 찾았을 때, 민주광장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모두가 마음 굳게 먹고 웃으며 앉아 있었다. 집회가 다 끝나고 환경미화 노동자 아주머니들은 학교에 온 손님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막걸리에 두부, 김치를 내놓으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학교곳곳을 청소했을 그녀들이 그 공간에서 당당하게 구성원이 되어 사람들을 맞이한다. 원씨 아주머니가 저 멀리 보인다. 달려가서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 “아이구, 어떻게 왔어? 이렇게 와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고마워. 고마워. 눈물날 때 마다 학생들이 응원문자도 보내주고, 이렇게 함께 싸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으니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몰라.” 아주머니는 내 손을 꼬옥 잡고 고맙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신다. 그렇게 마음과 마음이 더해져서 ‘연대’의 열매가 9월, 익어간다. 그리고 2008년 9월 10일 늦은 밤, “띠리릭” 문자가 왔다. 아주머니들의 소원대로 추석 전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주머니들은 오늘(16일)부터 다시 새벽 버스를 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근을 하셨을 것이다. 학창시절 매일 아침 웃으며 서로에게 인사를 나눴던 원씨 아주머니도 새벽 버스를 타고 출근하셨겠지.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바람 ● 가을을 기다리는데 가을은 언제 올까요? 평동에서의 생활, 1년이 지났습니다! ‘산다는 것’을 배우고 있어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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