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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10월호 [회원이야기] 물란의 생리대
임계재
남보다 늦은 나이에 초경을 맞은 나는 불규칙한 데다 엄청난 양에 진저리쳐야 했다. 그나마 매달 찾아오지 않는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이 귀찮은 행사는 아직 어린 내게 생리의 상징은 당연히 몰랐고 남에게 보여서는 절대 안 되는 은밀하고도 힘든 과제였다.
중국음식이 기름에 쩔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위진남북조(AD 4, 5세기) 즈음으로 본다.
전쟁이 하도 잦다보니 어린 새끼들 들쳐 업고 아무 때라도 피난길에 나서야했을 것이고 다가오는 끼니 챙기는 데는 볶은 음식이 그나마 오래 갈 터이니 그랬으리라.
만화로 만들어져 어린애가 있는 집이면 한 개쯤은 다 있을 영화 물란(우리나라 수입업자들이 뮬란으로 표기해 전공자들 거품 물게 만드는)은 가장 긴 중국 북방의 노래다.
내용은 간단하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 때문에 집집마다 아들 하나씩 전장에 내 보내야 하는데 ‘화물란(花木蘭) 집에 아들이 없어 베 짜던 물란이 남장하고 전쟁터에 나가 무려 십 년이나 병정노릇을 했건만 물란이 여자인줄은 아무도 몰랐더라’이다.
시험에 나올까 봐 떨면서 훑었던 이 시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동안 물란은 생리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였고 그 걱정에 머릿속은 근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나처럼 양 많은 여자였다면 다달이 찾아오는 그 행사가 웬수스러워 어떡하나, 어떻게 처리했을까? 걱정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심각한 고민이었다. 나는 운 좋아서 전쟁 겪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지구 곳곳에 욕심으로 죄 없이 시달리는 사람은 도처에 있지 않던가, 그러니 물란을 비롯해 느닷없는 전쟁으로 집 잃고 가족 흩어진 여인들의 눈물을 보며 내가 떠올린 생리대 걱정은 딱히 쓸데없는 일만도 아니었다. 정말 어떡했을까? 비 오는 날 다리 쑤시듯 쿡쿡 치솟는 의문은 십년도 넘게 이어졌다.
한 친구의 어머니는 고령이 되셨어도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뛰어나신 데다가 지나간 얘기를 맛깔스럽게 전하시는 분이었다. 아이를 열하나 낳았으나 다섯만 건진, 우리 앞 세대에 있을 수 있는 아픈 가슴을 지닌 분이시기도 했다.
“얘, 6.25 때 말이다, 난리가 났다고 사방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여자들은 월경이 딱 끊어지고…” 내 입에서 “으악!”소리가 터졌다. 오래 허덕이던 의문이 풀렸다, 해답이 나왔다, 해답이! 머리에서 막혔던 숙제가 뚫리면서 “쨍” 소리가 나는 듯했다.
누군가 말했지, 인간의 몸은 작은 우주라고. 왜 아니겠는가. 더욱이 여성의 몸이란 얼마나 신비하고 경이로운 것인지. 초경에 진땀 흘리며 기겁하지만 그것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더 놀랄 일은 비상시에는 월경이 멈출 수도 있단 말이다. 배란이야 되지만 말이다.
등에 업은 어린 것, 손에 잡힌 큰 것 그리고 이불보따리에 밥솥까지 챙겨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하는 전쟁통에 신비한 여인의 몸은 귀찮고 감당 안 되는 생리 출혈을 삶이 안정될 때까지 정지시키는 기막힌 작은 우주인 것이다.
서너 해 전, 악착같은 국민당이 추적을 포기한 누런 황토지대, 잠깐이라도 비가 내리면 뻘건 냇물이 절단 나게 마을을 휘돌던 깊은 오지, 공산당 유적지 연안(延安)에는 앞다리 들어올린 말 등에 한 손을 번쩍 들고 기세 좋게 몸을 가눈 채 당당하게 앉아있는 잘 생긴 북방처녀 물란을 만났다.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젊은 남자들 시글거리는 전쟁터에 남장한 채 끼어 든 자신의 몸이 남자 마냥 ‘생리 딱 끊긴 채’ 십 년을 잘 버틸 줄은. 그래서 천오백 년이 넘도록 물란은 칭송 받는 전쟁의 영웅이 되었으리라, 그 빌어먹을 전쟁터에서 들통 나 퇴짜 맞지 않고 버틴 것이 여성의 신비함이라는 사실은 여인 말고는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만화영화는 군더더기도 붙였다, 물란에게 반한 젊은 장군이 찾아왔으니 물란도 애기를 낳았겠지. 물론 십 년이나 멈췄던 생리도 돌아왔을 것이고.
가슴에 달라붙어 어미 몸에서 흐르는 젖 빨며 해죽거리는 어린것들, 특별히 쳐다보기도 아깝게 이쁜 딸에게는 이렇게 일러줍시다.
아가! 여인의 몸은 위대하고도 신비하단다, 그러니 몸 아끼고 사랑하며 간수 잘 해야 한단다!
거기에 하나 더 우리가 키우는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덧붙이면 어떨지.
아가! 목숨은 정말로 귀한 거란다, 엄마가 너희를 이 세상에 데려오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숭고했단다, 내 배에 네가 자리잡은 것을 안 순간부터 어미는 좋은 것, 정갈한 것 찾아먹었어, 바로 너를 위해서였다. 흉한 모습 피하고 평온한 마음 가지려 애쓴 것도 뱃속의 네 심성이 비단결처럼 곱기를 바라서였지. 뱃속에 너를 품는 순간 어미는 태반을 만들어 너를 편하게 앉혔지, 세상에 둘도 없이 귀한 나의 보배야! 그리고 너희가 우리 자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와 준 뒤로는 너희에게 위험한 것 안 먹이려 촛불이라도 손에 드는구나, 너희가 자라면 또 물란이 보여준 신비한 몸을 지닌 딸을 또 데려올 것이기 때문이지. 가슴이 저미도록 애틋한 어미들은, 물란의 후배들은 귀한 제 새끼들 지키려 제비새끼보다 더 이쁜 너의 입에 눈물겹게 수더분한 먹거리 넣어주려 동동거린단다.
마침 곁에서 젖을 먹이며 내 얘기를 들던 젊은 어미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이모님, 여인의 몸이란 것 알고 나니 소름이 돋네요.”
임계재 ● 중문학자, 숙명여대 지역학 연구소 중국학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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