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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12월호 [기획] 여장놀이를 추억하며, 젠더의 경계를 잠시 생각함
노재윤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여성임’에 대한 나이브한 동경과 부러움에 빠져들었고, 내 안에 숨어있는 욕망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남성의 몸을 가졌으며 상당한 정도로 이성애자라는 정체감을 가지고 있는 나는, 오래전의 한 멋진 책 제목마냥 나야말로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아. 내가 여자라면 정말 예쁘고 멋진 레즈언니가 될 텐데….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언니가 되는 대신 그냥 아저씨가 됐다. 그러니까 의학적인 시술을 원하거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되어야 안도할 만큼 진지한 욕망은 아니었던 게다.
하지만 ‘한번쯤은 여성이 되고픈’ 그 욕망을 지극히 소박한 방식으로 실현한 적이 있다. 지인들과 벌인, 가장무도회라 이름붙인 연말파티를 통해서다. 한데 모여 다양한 캐릭터로 분장/치장하고 음주가무를 벌이는 놀이가 몇 해 지속되는 동안, 내 변신 주제는 오로지 ‘여성인 무엇’이었다. 여성인 펑크족, 여성인 히피, 여성인…. 하룻밤 동안이라도 내가 원하는 여성으로 변신한다는 것. 그건 단순히 이벤트성 코스튬 플레이 이상의, 묵혀둔 욕망을 두근대며 실현하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진하게 화장을 하고, 긴 가발을 쓰고, 치렁대는 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말아올리고 무도회장에 올랐다.
잠시나마 여자가 된, 또는 되었다고 믿는 소녀… 그래, 여인이라 하자. 어쨌든 여자가 되었다고 믿는 여인은, 두꺼운 화장의 답답함과 허리를 죄는 치마의 압박과 스타킹의 불편함을 꾹 참아내고 다소곳이 앉아 ‘예뻐요’란 말을 기다린다. 변신이 끝난 뒤, 나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무도회장에 들어서며 말없이 앉아있는 나를 보고는 ‘당연히’ 여자인줄 알았다는 말을 전한다. 예쁘다는 말도 덧붙인다. 당연히 그래야지. 흡족해진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는 언니들에게 다가가 추파를 던진다. 멋진 오빠들이 보였다면 역시 추파를 던졌을 것이다. 여인은 트랜스젠더/섹슈얼, 게이/레즈비언, 바이섹슈얼의 다양한 경계를 가로지르며 스스로 익숙하던 몸과 섹슈얼리티를 무시하고 오인하는 해방감을 질펀하게 즐겼고, 잠시나마 행복했다.
자아도취에 가까운 행복감을 맛볼 수 있던 여장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생각한건,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여자됨’에 필요한 물리적인 조건이었다. 내 몸은 여장을 하기에 ‘적절’한가? 이를테면 화장, 치마, 여성들의 장신구 따위가 내 몸에 잘 맞나? 잘 맞았다. 다리도 이만하면 날씬하군, 피부가 좋으니까 화장도 잘 받을 거야, 머리도 작고 어깨도 좁으니 긴 치마를 입으면 늘씬해 보이겠지?….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내 몸을 바라본다. 이제 여장은 곤란하겠어. 부쩍 나이든 태가 나고 주름도 늘고 피부는 엉망이고, 허벅지와 종아리가 두꺼워지고, 심지어 배까지 나오는 것 같아. 화장을 해도 잘 안먹을테고 스타킹을 신어도 다리가 가늘어 보이지 않을텐데…. 몸의 변화를 절감하며, 언니오빠들은 여자로 변신하는 나를 더 이상 예쁘게 봐주지 않을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런데, 몸이 ‘못나게’ 변하면 여장을 못하는걸까? 여장하기는 여기서 딜레마에 빠진다. 여성이 되기에 ‘좋은’ 몸과 외모란 어차피 없잖아. 내 여장을 특정한 몸의 조건과 특정한 이미지에 제한하는 건 여성의 몸에 대해 사회화된 시선과 권력에 스스로를 거꾸로 묶어두는 게 아닐까? ‘나 역시 쭉쭉빵빵 언니들을 좋아하는 보통 남자일 뿐’이라는 자의식이 밀려온다. 게다가 내 여성으로의 변신과 변신후의 행태는 철저하게 구획된 젠더 위계를 따른다.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품목들을 최대한 활용해 몸을 치장한 뒤, 파티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 용기를 얻어 내 안에 있던 여성성, 실은 ‘여성적인 것’이라고 주입된 특질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 가능한 한 관능적이고 도발적으로, 그게 안 되면 가능한 한 다소곳하고 예쁜 척이라도. 그 외엔 달리 상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내 여장하기는 다양할 수 있는 젠더스펙트럼을 오히려 이분법적으로 재현하고 강화하는 퇴행적인 놀이는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다른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너무 빡빡하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놀이로서의 여장하기가 ‘성공’하는 전략은 분명해야 한다. 애초에 눈부신 꽃미남이라 치마만 둘러도 성별을 알아채기 어려운 조건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럴싸하게 보이거나, 그게 어려우면 여성성의 진부한 기호들을 과잉시키고 패러디하는 드랙퀸이 되거나. <왕의 남자>가 안 된다면 <벨벳 골드마인> 이나 <헤드윅> 비슷하게라도, 이도저도 안 되면 <록키호러픽처쇼>라도 해야 하는 거다. 결정적으로, 여성으로 ‘거듭난’ 지금, 어차피 주어진 젠더체계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면 <천하장사 마돈나>의 장사 소년(소녀)의 이상형처럼 자신감 넘치는 마돈나 흉내라도 내면 되는 거잖아? 난 그냥, 내 욕망을 표현하는 놀이를 즐겼을 뿐이고, 사람들이 예쁘게 봐주는 여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라고….
내게는 여성-남성의 몸, 여성성-남성성의 다양한 기호들 안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거나 혼란을 느껴야 하는 정체감, 일상과 일생을 걸고 싸우고 부딪쳐야 할 만큼의 정체감에 대한 고민이 없다. 트랜스젠더/섹슈얼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그저 여장놀이를 두고 느끼는 애매함은 질적으로 다르겠지만, 그 맥락은 비슷해 보인다. 소박한 욕망이나 호기심에 따라 이분화 된 체계를 넘어서보려는 놀이가 그 체계 안에서만 극단적으로 표현되고 제한된다는 것. 욕망이 그런 방식으로밖에 가시화될 수 없다는 건 ‘여장으로 여자 돼보기’의 역설이다. 강고한 젠더의 경계를 위반하거나 교란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경계를 벗어나는 기획을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여장하기’가 그 자체로 자기 안의 다양한 특질들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적극적인 놀이가 된다면 어떨까. 나는 그저 외양만 다르게 꾸몄을 뿐인데, 유체이탈을 하듯 남근의 유무와 호르몬의 종류와 학습된 남성성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나. 섹스/젠더 정체감에 대한 강박이 약한 덕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숨어있던 욕망을 겉모습의 변화로 드러내면서 실제로 몸이 변화하는 착각을 느낄만큼 정체감을 확장, 또는 확인(!)할 수 있었던 셈이다. 요컨대 꽃미남들의 멋진 여장이든 개그프로의 기괴한 여장이든,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드러내 ‘활용’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이런 적극적인 활용은 여장-남장/여성성-남성성의 이미지를 뒤섞으며 젠더/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해체하는(것처럼 보이는) 대중문화 아이템을 소비하거나 차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컨대 소위 메트로-크로스 섹슈얼리티는 미화된 이미지와 스타일로만 소비되는 측면이 크고, 드라마 속의 여장/남장하기는 결국 애틋한 이성애 관계를 완성하기 위한 극적 장치에 불과할 뿐이니까.
내 ‘불안정한’ 젠더를 앞에 두고, 내 욕망에 따라 기꺼이 수행한 ‘여장하기’라는 행위가 제기하는 젠더체계, 몸, 섹슈얼리티의 복잡한 맥락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뭔가 손쉬운 결론을 내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하지만 늘 중요한 건, 여장의 경험을 통해서든 다른 방식을 통해서든, 이분화 된 규범적 정체감이란 늘 부담스럽고 귀찮고 진부하며 허상임을 깨닫는 일이 아닐까. 그렇게 다양한 감수성과 욕망과 언어를 표현하면서 일상적이고 빤한 젠더관계에서 줄타기를 하며 관계를 확장하는 시도들이 중요한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여장하기-다른 성별이 되어보기는 이분법적 젠더체계의 뿌리를 흔들지는 못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분법이 우리에게 얼마나 깊게 박혀있는지 온몸으로 드러내고 보여주는 놀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노재윤 ● 다들 바쁘고 심란한 연말이라.
하지만 행복해요.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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