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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12월호 [국제통신원] 필리핀에서 보고 싶었던 것들
윤홍경숙
보고싶은 어머니!
필리핀 가게 되었어요. 꼭 필리핀일 필요는 없었지만 내가 활동을 해왔던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맘이 간절했답니다. 다른 나라에서 오래 머물 자신은 없었지만 필리핀이라면 자신이 있었어요. ‘ASIAN BRIDGE1)’가 필리핀에 있고, 선후배들에게 필리핀 생활에 대해 이미 들은지라 쉽게 필리핀을 선택할 수 있었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제주여민회에 적을 두고 ‘여성운동’을 해 온지가 꽤 되었더라고요. 그동안 제주여민회는 저에게 여성으로서의 자각, 충만한 자아 존중감, 세상을 볼 수 있는 눈, 풍부한 감수성 등 참으로 많을 것을 주었지요.
2년 전부터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요. ‘새로움’을 무엇이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어요. 막연히 다른 방식의 활동, 다른 삶, 다른 생각, 다른 활동가들이 궁금했고, 이런 것들을 통해 새로운 방식과 생각으로 운동을 하고 싶었답니다. 어머니도 알다시피 올해 제 나이가 40이 되었잖아요. 무언가 시작하기에는 적당한 나이이고, 여기서 주춤거렸다가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더라고요.
필리핀에 갔다 온 후배에게 “필리핀에 가면 새로움을 얻을 수 있을까?”하니, 너무나도 쉽게 “그래, 볼 수 있어.” 하더군요. 이만큼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온 필리핀에서 본 것, 가난한 사람들과 많은 아이들, 수많은 조직가들, 쓰레기들로 이루어진 쓰레기 산, 식민지의 역사, 해외이주노동자들, 어디서나 마주하는 게이와 트랜스 젠더, 물론 더 많은 것들을 봤지만, 하루 날 잡아서 더 이야기하기로 해요. 어머니!
필리핀은 스페인, 미국, 일본 등 오랜 식민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답니다. 이는 필리핀의 문화와 생활방식, 종교 등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고 하네요. 인구의 85%가 가톨릭을 믿으며, 사람들 대부분이 영어를 구사하고, 어디서나 미국문화(농구와 당구에 대한 무한한 애정 등)를 접하게 되지요. 7천개 섬으로 이루어지고, 각 지역마다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 필리핀, ‘필리핀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는 의문이 듭니다.
수많은 투쟁의 역사, 풍부한 천연자원 등을 가진 나라이지만 인구의 75%가 가난하다고 하네요. 이는 오랜 식민지 역사의 폐해이기도 하지요. 식민지 시대에 부를 획득한 대지주들이 오늘날까지 그 부를 유지하고, 확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까지 휘어잡고 있어서 자원분배는 요원한 일처럼 보입니다. 더불어 정치권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는 도를 넘어섰다고 하네요.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구집중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땅과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거지요. 그들 대부분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합니다. 최근 현 대통령은 도시빈민지역을 없애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빈민지역 대부분이 철거위기에 놓였습니다. 제가 잠시 머물렀던 ‘델판’도 철거예정지입니다. 지역주민들은 이주로 인해 직업과 집을 잃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답니다.
어머니, 난지도를 아시죠. 저는 그곳에 간 적이 없지만 필리핀의 쓰레기 산에는 다녀왔습니다. 사람들이 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되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더라고요. 비오는 날이면 걸어 다니기조차 힘든 땅에서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이 하염없이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행색은 난리도 아니지만, 이곳도 곧 매립이 될 거라고 하네요. 그러면 이들은 다시 어디로 가야할까요?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아야 할까요?
필리핀의 인구증가율은 높습니다. 한국의 시골에는 노인들만 살고 있는 반면 여기는 어디를 가나 아이들이 많답니다.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가톨릭교회와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정권이 만든 결과라 할 수 있지요. 최근 산아제한을 담은 가족계획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지만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국민 대다수의 신망을 잃은 현 대통령, 2010년에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필리핀사람들은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필리핀 인구의 10%(약 800만명)가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해외이주노동자 대부분이 여성들이 중동, 홍통, 싱가포르, 한국 등에서 가정부, 간호사, 간병인, 건설 및 산업노동자 등 단순노동에 종사한다고 하네요. 그렇지만 정부는 외화벌이를 위해 이주노동을 적극 권장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나 복지에 대한 대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하네요.
필리핀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났어요. 게이인 친구네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하고 조카가 있더라고요. 출근준비를 위해 열심히 화장을 하는 아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 거기에 있는 사람 중 저만 놀랐던 것 같습니다. 자식의 성정체성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어머니, 한국에선 감히 상상도 못하는 풍경이지요. 또 다른 친구가 “한국 사람들은 게이를 싫어하는 같다”고 하네요. 할 말이 없었지만 “한국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이성애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매매가 여성의 권리에 반하는 폭력이라고 확신하는 ‘BUKLOD’와 함께 했습니다. 거리에서, 클럽에서, 군사기지 주변에서 여성들이 가난을 넘어서기 위해 성매매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활발하지만 여성폭력의 문제는 여전히 많은 가족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필리핀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두 번의 ‘PEOPLE POWER’가 필리핀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과 조직들을 보면서 필리핀사회의 희망을 봅니다. 주민들을 만나고, 조직하기 위해 필리핀 사회 곳곳을 누비는 수많은 조직가들, 문제를 마주한 주민들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다양한 조직들, 제가 4개월 동안 만난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감동과 존경을 보냅니다.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을 채워가는 사람들, 내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것들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필리핀이 다시금 저를 일깨워 줬습니다.
1) 아시아 브릿지는 현재 필리핀에 있다. 2003년 2월에 설립하여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아시아적 토대 구축, 단체 활동가 교육프로그램 마련, 아시아의 네트워크 등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윤홍경숙 ● 제주여민회 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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