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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12월호 [마포나루에서] 이사정국
나우
육아휴직을 끝내고 민우회에 복귀하자마자, 제일 먼저 주어진 건 ‘함께가는 여성’ 원고였다. 육아휴직을 들어가기 직전에도 함여원고를 썼는데, 복귀도 함여원고와 시작하는구나. 함여원고를 쓸 때마다 마감시간을 넘겨서 담당자 속 꽤나 썩였었는데… 그래, 이번엔 내가 제일 먼저 원고 주고 함여담당자들한테 사랑받는거야. 우후훗~ 그래서 복귀한 날 처음, 나는 컴퓨터를 켜고 1년간의 육아휴직을 떠올리며 뭘 쓸까 고민하는, 오랜만에 참으로 달달한 고민을 했다. 그런데 하루만에 불길한 기운이 뻗치더니, 결국 함여원고는 그간의 운명처럼 내 머릿속에서 금세 사라져버리고 마감임박시간에 맞춰 쓰여지고 있다는 슬픈 현실.
복귀하자마자 내 주위는 20년간의 노동자료로 둘러싸였다. ‘나루에는 이 많은 자료를 둘 곳이 없어. 자료를 책으로 묶어 최소화해야 돼. move! move!’ 자료정리에 몰두하고 있는 상근자들의 모습은 흡사 무(모)한도전의 정신없는 그들 같았다. 이사갈 공간의 협소함이, 그동안 무던히 시도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되던 20년간 자료정리의 동력이 되다니, 새삼 의지를 넘어서는 물리적 힘에 감화되었다.
노동자료는 잊을 만하면 여기저기서 뭉텅이로 발견되었다. 그런 와중 옥상에서 녹이 슨, 열어보면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왠지 금덩이라도 살짝 숨겨놓았을 듯한 포스를 뿜어내던 낡은 캐비닛이 열렸다. 캐비닛을 연 광년은 나에게 와서 속삭였다. ‘협아… 미안해. 다 노동자료야….’ 그 안에서 손 대면 후두둑 부스러질 것 같은, 노동자료들이 우수수 쏟아진 거다. 오래된 자료를 보는 잠깐의 감동, 이어지는 긴 한숨.
노동자료화는 은날과 함께했다. 은날은 낱장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분류·정리하고, 나는 은날이 넘긴 파일의 세부목록을 만들고 제본을 뜨기 위한 복사를 했다. 요란하긴 해도, 은근히 나랑 쿵짝이 맞는 은날과 오랜만에 파트너십도 진하게 나눠본다. 누렇게 제멋대로 쌓여있는 노동자료들이 사라져가고, 뽀얀 A4용지에 양면으로 복사된 말끔한 노동자료들이 수북해져갈 땐 정말, 캐나다에 가 있는 박뽕이라도 불러 자랑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료정리와 짐정리가 길어지면서 퇴근시간도 자연 길어졌다. 밤이 되면서 음주업무를 즐기는 상근자들도 눈에 자주 띈다. 이사날짜가 가까이 오면서 전체자료를 담당하는 팀에서 자료정리 마감시간을 알리며 압박해온다. 그때의 마음은 어느 동화 속, 백조로 변한 오빠들을 위해 화형장에 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옷을 짜던 다급한 동생의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흑.
노동자료를 정리하면서 과거로 갈수록 자료정리는 더 잘 되어 있었다. 컴퓨터도 마땅하지 않았던 시절, 손글씨로 어찌나 정성스럽게 자료화를 해놓았는지! 그래서 나는 뜻하지 않게 복귀하자마자 한참이나 반성모드였다. 그러다가, 2004년 내가 민우회에 처음 들어와서 담당했던 ‘평등한 일·출산·양육 캠페인’을 정리하게 됐다(이때 반성의 절정을 경험함).
이때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당시 캠페인 중 ‘평등양육계약서’라는 아이템이 있었는데 마땅히 샘플을 쓸 사람이 없어서, 내가 당시 사귀던 사람과 함께 쓴 평등양육계약서가 있었던 거다. 캠페인에 활용할려고 칼로 무자르듯 오차없이 양육을 절반분담하려는 캠페인담당자(나)의 노력이 곳곳에 보여 웃음이 났다. 그때 이 계약서를 함께 쓰면서, 당시에 없던 배우자출산휴가를 놓고도 계약서에 며칠로 넣을까 한참을 씨름하고, 육아휴직은 둘 중 하나만 해야 하는 줄 알고 그 선정기준에 심혈을 기울였었다. 게다가 위반시 강력한 무엇인가를 넣어 계약서를 이행하게 하려고 머리를 짜냈던 흔적(이건 나름 사회통념에 반한다고 지운 기억이…)까지 보인다. 다행히(?) 평등양육계약서를 같이 쓴 사람과 결혼도 하고, 번갈아 육아휴직을 하며 아이도 함께 키우고 있어서, 그때 함께 쓴 평등양육계약서는 현재 우리의 양육분담과 태도를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 음…, 그럴까? 생각해보니 민우회 복귀 후 아기가 잘 때 퇴근하며, 전혀 아기의 양육을 함께 하지 못했던 지금의 이사정국! 은 적절한(유리한) 평가지점인 것 같지 않다. 이젠 낡은 캐비닛이 나올 일이 없으니, 이런 격정적인 일정이 지나간 평온한 시점에서, 나 역시 적극적으로 양육을 도울 수 있는 그때가서 평등양육계약서를 함께 보며 즐겁게 얘기를 나눠봐야겠다. 그날이여, 어서오라!
나우 ● 다시 한번 울부짖음 ‘그날이여! 어서오~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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