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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4월호 [나의 삶, 나의 이야기]나의 성우 이야기!!
최옥희 ●
딸의 권유로 민우회 회원이 된 지 1년 가까워 온다. 그동안 <함께가는 여성>을 통해 회원님들의 다양하고 재밌는 얘기를 읽으면서 내 직업인 ‘성우 이야기’도 하고 싶어졌다. 아주 가볍게!!!
방송 잘했다는 얘기보다 실수담이 더 재밌겠지?
1970년대 초·중반쯤 명언이나 수필을 낭독하고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의 여로’라는 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다. 피디가 써준 원고를 읽고, 끝에 지은이를 말하는데 난 ‘채근담에서’라고 읽어야 할 것을 그만 ‘체조담’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버렸다. 사실 그때까지 난 채근담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피디의 안타까운 표정이라니…ㅋㅋ
청취자들의 희망 곡을 엽서로 받아 사연과 함께 들려주는 가요 프로를 진행 할 당시 ‘노고지리’라는 쌍둥이 형제가 신인가수로 막 뜰 때였는데, 피디가 깜빡 잊고 원고에 가수 이름과 곡목을 안 적어 놨다. 벌써 전주는 나가고 당황한 나는 모른다는 싸인을 보내고… 눈치 챈 피디가 밖에서 음반 자켓을 보여줘 노고지리인 줄은 알았다. 근데 곡목은? 잠깐 생각하더니 잔을 들어 뭘 마시는 흉내를 내 보인다. 난 O.K. 싸인을 보내고, 불이 들어온 순간 내 입에서 나간 말- “네, 노고지리가 부릅니다. 술잔!” 순간 밖에서 엔지니어와 피디가 뒤집어졌는데 그 노래 곡목은 ‘찻잔’이었다.
이건 내 실수담이었고 다른 사람들 것도 몇 개 더 추가하자면 ‘지금 시각은 몇 시 몇 분입니다.’라고 해야 할 것을 ‘몇 도 몇 분입니다.’라고 했으며, 패티 김의 ‘푸른 사랑의 호수’를 ‘푸른 사탕의 호수’로 발음해버리기도 했다. 야구를 모르던 한 여자 아나운서는 뉴스 시간에 그날 있었던 야구대회 소식을 전하는데 ‘만루 홈런’을 ‘만추홈런’으로 읽어 그야말로 홈런을 터트렸다. 하긴 그때가 가을이기도 했지. 훗. 다 지난 일이니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때 당사자들은 쥐구멍을 찾을 만큼 죽을 맛이었다.
방송을 하다보면 실수는 있기 마련.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도 중요하다. “뭐 어때? 그럴 수 있는 거지”의 ‘배 째라 식’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기분까지 상하게 한다(주로 선배급 들에 있지만;). “에이 옆에서 자꾸 뭐라 수근 대니까 신경 쓰이잖아”, “아이고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더니 혀가 꼬이네.” 등은 핑계 형인데, 누가 그러랬나? 좀 얄미운 과다. 그런가하면 당황해서 얼굴 빨개지며 “죄송합니다, 어떡해, 어떡해,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잘하겠습니다.” 주로 신입 성우나 경력이 오래 되지 않은 후배들의 경우다. 이럴 때 전체적인 분위기, “괜찮아, 선배들도 다 그렇게들 컸어.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 성우사회다.
목소리의 배우들
어쨌든 이렇게 개성 강한 사람들이 모인, 그야말로 ‘목소리의 배우’들인데 그렇다고 늘 즐겁기만 한건 아니다. 가끔 제기되는 문제지만 영어 좀 하시는, 그리고 영화에 대해 좀 아시는 분들이(일부 소수지만) 외화를 볼 때 성우들의 더빙이 원작의 본질을 흐리게 하므로 차라리 자막 처리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 본질을 흐린다는 게 뭔가? 이상한 톤이나 어미처리를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우리식으로 편안하게 대사 했으면 하는데 우리 것도 아니고 그네들의 자연스러운 체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성우들이 따끔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도 있다. 영화를 보는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자신이 극중 인물이 된 것처럼 몰입하게 하는 것도 연기하는 성우들의 몫이므로 더 노력해야한다. 그러나 분명 환경이나 문화가 다른 그네들의 삶을 직접 살지 않은 바에야 어차피 상상하며 연기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로마의 휴일’을 더빙하면서 우리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최불암, 김혜자씨 대사처럼 할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거기다 자막이라는 게 그렇다. 외국어와 우리말의 어법이 달라 뜻을 표현 하는데 한계가 있다. 문제제기를 해주신 분들은 잘 이해할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더 많은 시청자들, 예를 들어 연세 드시거나 나이가 어려 눈으로 자막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어린이들이 보는 만화영화에 자막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나, 집안에서 주방 일을 하면서, 혹은 뜨개질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영화를 볼 수도 있는데 잠시라도 자막을 놓친다면 이야기의 맥락이 끊어지고 재미마저 감소할 수 있다. 또 시각 장애인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청각 장애인들의 경우는 반대로 자막이 꼭 필요한 부분이지만 지금은 성우입장의 얘기임을 밝혀둔다(그래서 수화방송을 하는 곳도 있고). 문제를 제시해준 분들과 싸우자는 얘기가 아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고마운 충고로 받으며 감사한다. 그러나 성우들의 문제만이 아닌, 다른 여러 가지의 파생되는 문제점들도 감안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빙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난 건데 꽤 많은 성우들이 ‘책읽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시간 나는 대로 가서 책읽기 녹음을 해서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듣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일을 맡아 하는 단체가 있고, 성우들은 녹음만 하지만 내가 가진 재능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위해 쓸 수 있는 것도 보람이다.
소소한 얘기들로 지면을 다 써버렸지만 나의 성우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하고 싶다. 흔히 성우들의 시대는 갔다고 하는데 우리의 역할은 크고 많다. 각종 예능 오락 프로, 다큐멘터리, CF,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키워주는 각종 만화 채널, 외화더빙 등 중요한 부분엔 성우가 있다. 개인 팬클럽까지 있는 스타급 성우들도 많다.(물론 난 아니지만…^^;) 지금도 꿈을 갖고 열심히 실력을 쌓고 있는 성우 지망생들에게 격려를 보내고 싶다. 개인적으론 아이들이 어려서 한참 엄마 손길을 필요로 할 땐 정말 바빠서 미안했는데 반듯하고 곱게 자라준(어미 눈에) 아이들이 이젠 ‘당당하게 일하는 엄마여서 좋다’는 평까지 해주니 35년이 넘는 세월을 성우로 살아온 내 인생이, 내 직업이 성우라는 게 난 참 좋다.
최옥희 ● 73년 데뷔. 현 KBS 성우
출연작품 : 외화 ‘해리포터’ 외 / 만화 ‘앗싸 응가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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