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4월호 [기 획] 내안의 ‘다중이’ - 모순과 분열은 창조성의 원천이다!
권수현 ●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언젠가 “‘정의’라는 개념은 때로 무의미하고 위험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미묘하고도 복잡한 울림을 남기는 말이다.
요즘 한국의 정치 상황을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데이비드 하비는 지난 30년간 패권을 장악해왔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일컬어 특권층을 위한 ‘계급 복원 프로젝트’라고 명명한 바 있다. 구태여 분배적 정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과 고난을 기반으로 어렵게 얻은 민주주의 가치가 무너지는 광경을 매일 보고 있노라면 분노를 넘어서 참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욕망의 가치가 도덕과 정의의 가치를 압도해 버린 작금의 정치적 상황은 우리에게 조금 다른 방식의 정치적 화법과 사유의 틀을 모색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진보 정치의 존재론적·도덕적 기반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의 사유 및 실천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최근 이와 관련하여 서로 연결된 두 가지 지점에서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다. 비판적 지식인 혹은 활동가로서, 첫째 “어떻게 사회에 말을 걸 것인가”, 둘째 “자신의 인식론적·존재론적 기반을 어디에 둘 것인가”하는 점이 그것이다. 내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 계기 중 하나는 현 정부 집권 이후 경찰의 태도이다. 촛불 집회와 용산 참사에서 극적으로 가시화된 바, 그동안 서로 긴장과 갈등 관계에 있었던 경찰과 검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놀라울 정도로 호흡을 척척 맞춰가면서 집권 세력의 도구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여기서 나의 눈길의 끌었던 것은 철저하게 권력에 동일시하는 경찰의 태도였다. 어쩌면 이는 한동안 ‘진보 정치 세력’으로부터 도덕적 비판과 단죄를 받아왔던 사람들의 ‘피해의식’이 응축된 ‘대동단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개혁과 진보에 대한 대대적인 반발 현상은 개혁 기반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 사회가 도덕적·정치적 자정 능력을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싸움이기도 하다. 하지만 돈과 권력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에서 이러한 반격은 비판적 지식인·활동가들에게 대단히 위협적인 공포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는 비판적 사회 운동 방식이 한국 사회에서 타자와 주변인에 대한 감수성과 인지 능력을 구축하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식론적·도덕적 우월감에 기반을 둔 계몽의 정치는 대상을 훈계하고 단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계기로 상대가 자신의 사고와 위치를 성찰할 수 있는가하는 점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럼 ‘승자독식’의 서사가 난무하는 현 상황에서, 어떻게 타자화되고 주변화 된 사람들의 ‘인간다움’을 가능케 할 것인가.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이는 나를 포함하여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쳐왔던 동료들이 풀지 못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이 숙제를 풀기 위해서는 서둘러 정답을 내리고 제시하려는 성급함에서, 그리고 진보/보수, 좌파/우파의 이분법적 대립각에서 벗어난 사유와 정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진보 대 보수, 좌파 대 우파의 이분법적 이념 대립의 자장 안에 갇혀 있었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이는 주어진 상황에 대해 다양한 의미들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과 인식론적 자기 확장 능력(즉 소통의 능력)을 마비시켜왔다. 이념의 과잉은 개념의 과잉을 만들어내고, 과대 포장된 기표로서 작동하는 개념은 온갖 기의들을 빨아들이고 축적하면서 사람들의 사유 능력을 제한한다. 이 거대한 질주의 드라마 속에 철저하게 무력하게 휩쓸려갈 수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이 이념과 개념의 과잉과 범람이 야기한 사유 능력의 마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덕적 정답과 명분만으로 ‘사회에 말 걸기’가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건 내 경험을 돌아보더라도 분명하다. 나에게도 여성운동을 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자기 검열의 잣대는 운동의 동력인 동시에 사유의 블랙홀이기도 했다. 여성주의 활동가로서 살았던 30대는 내 인생에서 ‘이보다 더 뜨거울 수 없었던’ 치열한 시간들이었다. 그 뜨거움과 치열함에 대한 기억은 지금 내 안에서 또 다른 사유의 원천으로 작동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무엇이 나에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와 활동을 교착상태에 이르게 했는가에 대한 고민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 서경식(디아스포라 존재론), 글로리아 안잘두아(in-betweenness), 다나 해러웨이(사이보그 존재론)에서 주목하게 된다. 내 방식으로 이들의 논의를 번역해 보자면, 이들의 공통점은 ‘소속(belonging)의 정치’를 거부하면서 그 사회에서 불안정하고 모순적인 존재들, 중심과 주변의 경계 사이에 있는 공간에서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서경식의 경우, ‘재일조선인’이라는 불안정한 혼종적·양가적(in-between) 위치를 고수하면서, ‘국민’의 바깥에서 살아온 사람, ‘국가’, ‘국민’, ‘우리’, ‘고향’이라는 단어에 불편하고도 어색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의 경험 세계를 새로운 변화의 참조지점으로 삼고 있다. 그가 ‘재일조선인’이라는 ‘반(semi)-난민’의 위치를 고수하는 이유는 그 위치에서만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순과 불안의 공간인 양가적 위치는 어쩌면 가장 보수적인 귀속 지향성을 일으킬 수 있는 지점이다. 중심에 진입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자원과 가능성을 가진 중산층이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될 수 있듯이 말이다. 내가 그의 논의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독특한 화법 때문이다. 그는 정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 공간에 고집스럽게 머물면서 자신의 역할을 양쪽에 ‘질문을 던지는 자’로 설정한다. 그는 한국과 일본 어느 한쪽에 귀속되길 거부하면서 그 대신 “‘국민’이란, ‘우리’란 무엇인가?”, “‘고향’은 어디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타자 혹은 주변인을 생산하는 장치로서의 ‘국가-국민’의 틀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위치가 갖는 존재론적·인식론적 긴장과 모순적 가능성을 예민하게 의식하되, 그 위치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 그것은 치열함이 요구되는 정치적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이란 이쪽과 저쪽의 경계 영역에서 발생한다.” 언젠가 신문에서 불교 사상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이 문장에 확 꽂혔던 적이 있다. 좌우의 이념적 대립각의 바깥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를 탈정치화하자는 말이냐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제안하는 사유의 방식은 그 경계의 공간은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철저하게 주변적이고 타자화된 존재들의 경험세계를 준거 틀로 삼되, 양쪽 모두를 볼 수 있는 위치에서 누구나 당연하고 자명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에 질문함으로써 그것을 낯설게 만드는 것. 서둘러 정답을 내리기 보다는 모순과 불안, 혼란의 경험에 주목하고, 그것을 새로운 정치적 발화의 지점으로 삼는 것. 어쩌면 지금은 그러한 정치적 화법과 인식론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아닌가 싶다.
한국 사회가 ‘탈취에 의한 자본 축적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벌이고 있는 지금,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대중과 지식인의 탈정치화가 아닌가 싶다. ‘세계화’, ‘선진화’ 등 세련된 수사로 포장된 폭력 기제에 대해 더 이상의 사유를 멈춘다면 그것이야말로 위험 사회의 징후가 아닐까.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관> 건물 외벽에서는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조정래의 글이 새겨져 있다. 한편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인간과 자연에 행하는 폭력을 멈추기 위해서 ‘정치적인 것’의 사유와 실천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정의’라는 것,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이 자명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질문을 통한 끝없는 사유와 실천의 과정이므로.
권수현 ● 최근 열공을 위해서 짧은 컷트 머리를 했다.
결국 꽃샘추위 바람에 감기와 신경전 중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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