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4월호 [철학노트] 봄의 정원으로 오라
철학노트는 190호(2009년 3~4월호)부터 새롭게 신설된 꼭지입니다. 혼란함의 시대에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조금은 천천히, 조금은 돌아서 대안에 대한 다양한 중얼거림과 시선을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날씨만 황사로 우중충한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 한 가득 희뿌연 한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까?”, “왜 유독 나한테만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왜 이렇게 우울할까?”, “도대체 행복은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겉으로 딱히 표현한 적은 없지만, 이런 질문들을 혼자 중얼거려 본적이 있는가? 자, 이제 당신들은 철학자가 될 수 있는 출발지점에 서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힘듦이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길거리에 즐비해 있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광고 속 이미지들은 우리로 하여금 늘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새로운 욕망들을 부추기며, 새로운 구매리스트를 작성하게 한다. 좀 더 멋진 옷과 장신구, 좀 더 비싼 명품백, 좀 더 편안하고 멋진 자동차, 좀 더 큰 TV, 좀 더 큰 아파트…
이런 것들 중에 하나를 갖고 싶은 욕망이 충족됐다고 하자. 예를 들어 평면으로 된 TV를 장만했다. 그럼 이제, 행복한가? 물론 잠시는 만족스럽다. 그러나 이내 사이즈가 조금은 더 컸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생겨난다. 그래서 사이즈가 조금 더 큰 것을 장만한다. 그런데 이왕이면 음향시절도 좋아서 홈시어터의 기능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홈시어터 기능의 TV를 장만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모델의 색깔에 사로잡히고 나면, 곧바로 그것으로 바꾸고 싶어진다.
왜 원했던 물품을 구입해서 결핍되었던 욕망이 충족되었는데도, 잠시 행복하다가, 또다시 불만스럽고 싫증이 나면서 좀 더 다른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철학이 제공하는 위안, 철학의 치유책은 조금은 색다르다. 왜냐하면 철학은 좀 더 극단적으로 인간의 욕망에는 한계가 없다는 성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결핍된 욕망을 충족시키자마자, 우리는 계속 “좀 더” 강도 높은 그 다음 단계의 쾌락을 욕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더 고통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쾌락의 역설을 잘 이해한 철학자가 에피쿠로스이다.
흔히 그가 대표적인 쾌락주의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부~자되세요!”의 행복, 즉 쾌락의 행복은 그가 추구했던 즐거움과 같은 것이 아니다. 물론 그가 추구한 것이 우선적으로 ‘고통, 공포, 결핍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한 헤도네(hedone)는 흔히 번역되는 것처럼,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밖으로 향하면서 광고 속에 보인 숱한 유혹의 현란하고 사치스런 모델의 이미지를 조금씩 모방해가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각자 자신의 내면세계로 눈길을 돌리고, 남이 대신해주지 않는 자신만의 사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소박한 즐거움들이다. 이와 같이 에피쿠로스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 마음의 숱한 동요에서 해방되어 누리는 고요함, 즉 아타락시아(ataraxia, 평정심)에 도달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쓸데없는 걱정들의 동요와 우울함을 다스리는 데에는 자신의 내면을 찬찬히 이성적으로 돌아보면서 분별력을 발휘하는 것, 즉 인간에게 고유한 지성을 활용하는 철학적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그리하여 생각의 힘을 기르고, 자신만의 색깔을 가질 수 있게 되면, 늘 반복되는 광고가 불러일으키는 사이비 욕구, 별 생각 없이 퍼붓는 남들에 대한 소문들, 사소하지만 유독 자극적이었던 나를 향한 비난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힘도 생겨난다.
그런데 가끔은 혼자만의 사색만으로는 부족하고 또한 외롭다. 그 순간 우리는 주위를 둘러본다. 도대체 이러한 힘듦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겨냈을까? 의외로 너무도 평범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 고민거리, 고통과 씨름하면서, 그리고 그것들을 깊은 사색 속에서 곱씹고 새롭게 이해하고자 시도하면서, 진정한 작가와 철학자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작가나 철학자들이 삶의 난제들을 단번에 시원하게 해결해 주거나 정답을 제시해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깊은 통찰력과 지혜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고통과 힘듦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며, 그 도움으로 고통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통이 견딜 만 해질 수는 있다.
기원전 306년 에피쿠로스는 친구들과 아테네 근교로 이사해서 함께 살기 시작했고, 그곳을 ‘정원’이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들은 그곳을 학교, 또는 공동체라고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그 정원에서 그들이 누린 삶의 방식이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 “한 인간이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혜가 제공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말했고, 자신의 정원에서 그 우정을 가꾸었다. 또한 노예와 여성들에게도 그 기회를 허용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의 삶은 단순하고 소박했지만, 그러한 삶의 방식이 알려지자, 그의 정원에서 함께 사색하고 토론하며 우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에피쿠로스는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즐거움을 제공한다”고 말했고, ‘사치스러운 이미지의 환상을 경계하라’는 그의 메시지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돌벽에 새겨지기도 했다. 다시 종합해보자면, 에피쿠로스에게 진정한 행복이자 즐거움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다양한 물품들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내면세계에로의 사색, 마음의 동요에서 벗어난 고요한 자유로움, 소박한 식탁에 둘러 앉아 얘기 나누는 지혜로운 친구와의 대화에 있었다.
경제위기와 함께 왠지 더 우울해지는 요즈음,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힘듦을 좀 더 근본적으로, 그 뿌리에서부터 이겨내고 싶다면, 진정한 철학자가 되어보자! 사치스럽고 현란한 이미지들의 환상을 깨뜨리고, 그 욕망의 출렁임을 들여다보면서 나만의 고유한 내면세계로 향하는 사색의 여행을 시작해 보자. 그러고 나서 비슷한 고민을 가진, 가깝고도 먼, 멀고도 가까운 친구들을 향해 새롭게 대화의 문을 열자.
소박한 우정을 함께 나누었던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그 옛날 아테네 근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맞이하는 지금 여기, 이 봄의 정원에 있다. 때로 내면에로의 사색에서 느껴지는 힘듦과 외로움을 토로하다보면, 봄 햇살과 같은 친구의 따스함, 그리고 철학자들의 정원에서 수 세기동안 땅 속에 깊숙이 묻혀있던 통찰력과 지혜의 자양분을 접하게 된다. 긴 겨울동안의 추위와 외로움에 떨었고 비록 지금은 황사 비를 맞고 있지만, 이제 나의 생각이 자그마한 새 생명의 싹을 틔우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 생각 있는 여성이라야 한다!
자, 여성 철학자들이여, 루미가 노래한, 그 봄의 정원으로 오라.
봄에는 정원으로 오라
거기엔 술이 있고 연인들은 석류나무에 꽃을 피운다
만일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만일 그대가 온다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노성숙 ●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철학상담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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