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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6월호 [문화산책] 생애전환기 이후에 보이는 것들
문화산책-생애전환기 이후에 보이는 것들
권수현 ●
몸의 구석구석에서 퇴행성 질환의 징조가 보이고, 뭘 좀 해볼라치면 몸이 도대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하는 시기에 진입해서 그런 것일까. 최근 접한 책이나 영상물엔 유독 ‘죽음’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았다. 일본 드라마 「바람의 가든」(2008),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죽음과 죽어감』(2008, 이레), 도리스 되리의 「사랑한 후에 남겨진 것들」(2008), 그리고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1953)에 이르기까지 어쩌다 보니 내가 고른 텍스트가 죄다 죽음을 앞 둔 노인이나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사랑한 후에 남겨진 것들」은 올 들어 지금까지 본 영화 중 단연 으뜸이었다. 영화를 보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여운이 한동안 지속되면서 ‘살아있다’는 것이 새삼 충격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줄거리인 즉, 시골에 사는 노부부가 대도시에 사는 자녀들을 방문하러 갔다가 부인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설정이다. 영화의 구성은 부인의 죽음을 기점으로 아내의 관점에서 다뤄진 전반부와 남편의 관점에서 다뤄진 후반부 등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에서 아내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편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남편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남편의 죽음을 앞두고 그것을 거울삼아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 것인지, 늙은 아내는 아내로, 세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가면서 포기했던 것들을 떠올린다. 흰색의 얼굴 분장을 한 채 몸짓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일본의 부토 댄스는 그녀가 자신의 생에서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로서가 아닌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서 열망했던 어떤 것을 상징한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부토 댄스 공연을 관람하고자 하지만, 남편은 그것을 즐기지 못하고 공연장 밖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는 부토 댄스가 상징하는 어떤 결핍, 그로부터 기인하는 그리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후반부에서 홀로 남겨진 남편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갑작스레 모든 게 낯설어진 공간을 헤매기 시작한다. 부인이 떠난 후 세상은 이제 그에게 상실의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해 떠도는 길 잃은 배처럼, 그는 바쁜 도시 생활로 인해 혹은 해묵은 감정 때문에 자신을 외면하는 자식들, 그리고 아내가 평생 그리워했던 일본의 낯선 도시를 배회하면서 아내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그는 아내의 유물을 몸에 지니고, 그녀가 사랑했던 일본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녀와의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노부부의 ‘그리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나에겐 아내가 떠난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남편의 그리움이 더 절절하게 와 닿았다. 떠난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의 상실감이 더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아내의 그리움과 남편의 그것이 전혀 다른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내의 그리움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열망과의 ‘만남’이기에 무언가가 채워지거나 충족되는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반면 남편의 그것은 ‘아내의 죽음’이라는 갑작스런 상실, 익숙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시공간이 주는 허전함, 당혹감과 맞닿아 있기에 더욱 깊고 크게 다가왔다.
영화의 템포는 지극히 느리다. 영화 속 시간은 세상의 속도와 낯선 공간을 버거워하는 노인의 관점을 따라가면서 아주 느리게, 천천히 흘러간다. 여백이 많은 영화다. 그 여백들 사이로 노부부의 감정의 결이 섬세하게 읽힌다. 누구나 영화 속 특정 장면에 감정적으로 몰입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 한석규가 홀로 남겨질 아버지에게 TV 리모콘 작동법을 알려주는 장면, 깊은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흐느끼는 장면을 보면서, 가까운 사람을 여읜 적이 있는 사람들만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을 느낀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그렇게 사소하고 일상적인 장면들이 가슴 속 깊은 곳에 파문을 일으킨다. 함께 떠났으나 홀로 돌아온 집에서,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면서 뭘 할지 몰라 우두커니 앉아있는 장면, 낯선 도시에서 어딘가로 향하기 전에 자신이 있던 곳 어딘가에 손수건을 묶어두는 장면 등, 일상적이고 소소한 장면들이 잔잔하고도 깊은 여운을 남겼다.
“죽음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이다.”
일본 드라마 「바람의 가든」에 나오는 대사이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삶’ 자체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죽음을 다룬 영화들 중에는 유독 템포가 느린 것들이 많다. ‘느림과 여백’의 미학을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살아있다’는 감각을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생애전환기를 넘어서면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의 문제를 사뭇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이 생에서 무엇을 이룰 것인가?”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는 크게 다르지 않은 문제라는 것. ‘사랑한 후에 남겨진 것들’, 제목에서 어딘가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그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느림과 여백’의 미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권수현 ● 자신의 장점을 아주 잘 아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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