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6월호 [기 획- 촛불,잊을 수 없는 그 의미하나] 촛불 산책
[기 획 - 촛불,잊을 수 없는 그 의미하나] 촛불 산책 하실래요?
바다 ●
촛불관련 기획특집기사가 눈에 띄는걸 보고 ‘벌써 오월인가’ 한다. 계절이 바뀌고 해를 넘겨 봄은 다시 찾아왔지만 광화문은 광장 조성 공사다 뭐다 포클레인 소리가 그칠 날 없고 시청 앞 광장은 연중 ‘행사 중’이다.
촛불 1년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에 시쳇말로 ‘멍’ 때린 채 시간만 보냈다. 글을 쓰는 부담감도 있겠으나 ‘1년이 뭐?’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도배했다. 난 여전히 경찰에 욕지거리를 해대며 촛불문화제를 기웃댈 뿐인데.
내 촛불은 어디로 가야하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혹은 가졌을 거라 생각한 사람들과 함께 도로를 광장을 뛰놀던(?) 그날들은 분명 내 인생에 몇 안 돼는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 보수 논객이나 ‘ㅈ·ㅈ·ㄷ’들이 뭐라고 밟아대든지 난 그냥 사람들과 거기에 서 있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촛불을 들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였다.
벌써 일 년인 지금 촛불의 뜨거운 맛을 봤던 MB는 5월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보다. 2명이상 모이기만해도 그 몇 배의 장난감 병정 같은 경찰들이 떼 지어 나타나 ‘해산하시오’ 한다. 요즘엔 고춧가루보다 더 강력하다는 ‘캡사이신*’을 태운 액체로 참가자를 점찍어 연행한다고 한다.
폭력에 유치함을 더한 경찰의 행태에 장단을 맞추다보면 내 경우엔 처음에는 속이 문드러지다가 나중에는 무력함에 빠져들었다. MB가 원하는 게 이런 걸 텐데 계속 당할 수는 없다. 촛불 경력 1년차, 털어낼 건 털어내고 촛불을 들고 유유히 느리게 산책하기로 한다. 장기투쟁사업장에서 용산 남일당에서 탄압받는 억울한 사람들 옆에서 가늘고 질기게.
향그러운 가슴 중 한 사람으로 남길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7년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중 >
1967년 군부독재 아래서 발표된 이 신동엽의 시가 세기를 넘어 2009년을 살아가는 내게 위안을 준다.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할 수 있겠냐 만은 1년 남짓한 집권 기간에 수십 년을 후퇴시키는 MB의 솜씨로 말미암아 그 때 그 억압의 시절을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1년 전 시작된 정부의 언론장악, 진보 시민단체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변한 것은 없고 사람들이 무기력 또는 냉소로 일관하는 사이 자유는 조금 씩 빛을 바래고 있다.
직업상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되는데 언론은 김연아의 아이스쇼를 침 튀기며 중개했지만 정작 같은 날 노종면 YTN노조위원장의 구속에는 담담했다. 조·중·동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입을 모으고 도주의 위험을 이유로 들어 구속영장을 발부한 검찰은 도대체 누굴 위해 존재하나? 사실 난 정권 따라 논조를 180도 바꾸는 이 언론들을 보수라고 부르고 싶지도 언론이라고는 더더욱 칭하고 싶지 않다. 이들은 다름 아닌 껍데기, 쓰레기 일뿐이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두 번 죽인 건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매도한 조·중·동으로 대변하는 소위 보수 언론이다. 이것이 정부여당이 끈질기게 방송신문을 장악하려는 이유다.
정당한 이유로 싸우는 언론인의 구속,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희생된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에 무관심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핑크빛 희망사항이라고 해도 뭐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나는 촛불이 향기로운 흙내음을 풍기며 이어지길 바란다. 나도 그 속의 한 사람이, 알맹이가 되기를.
누군가 촛불 1년을 돌아보며 광화문은 촛불이 몰려오기 전에도 밝은 곳이었다고, 이제는 사회의 어두운 곳으로 촛불이 옮겨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어느 똑똑하신 분이 선수 치셨다. 저마다의 가슴에 품고 있는 촛불을 꺼내 산책하시지 않을래요?
바다 ● 다이나믹 코리아를 실감하는 요즘,
무기력을 걷어내고 다시 공생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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