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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6월호 [민우칼럼 창] 눈물의 삭발과 로리타의 긴 금발
민우칼럼 창 눈물의 삭발과 로리타의 긴 금발
유선영 ●
이 글에선 지난 4월 잠시 가졌던, 어떤 일들에 대한 불편했던 느낌을 나름 반추하면서 한국에서 젊은 여성들이 ‘사회운동’ 혹은 ‘정치투쟁’을 실천하는 방식과 문제의식에 대해 짚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다소 과감한 비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난 4월, 대학생 등록금인하투쟁의 하이라이트가 된 여대생들의 삭발투쟁을 일본의 ‘반빈곤네트워크’ 부대표인 아마미야 가린의 운동방식을 가늠자로 삼아 논하고자 한다.
‘눈물의 삭발’이라는 표현은 지난 4월 그리고 현재도 계속 중인, 연간 1천만원을 오르내리는 대학등록금 인하투쟁을 관통하는, 당사자 대학생들의 절박함을 표상하는 상징어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앳된 얼굴의 긴머리 여대생이 학우들의 고통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너무나 절박하고 절실한 문제를 더 알리기 위해’(4월 10일 삭발을 한 홍익대 총학생회장 한아름양의 말, KBS뉴스, 4월 22일자 인터뷰) 감행한 삭발의식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고 다수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MB의 대선공약이었던 등록금 반값 인하론에서 발원한 대학생의 등록금투쟁은 홍대, 숙명여대, 전국예술계대학생연합의 회장 및 대표직을 맡은 여대생들의 잇달은 삭발을 통해 매체의 이목을 끄는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듯 보인다. 그러나 학자금대출 상환에 시달리다 신용불량자가 되고, 온갖 궂은 알바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면서 젊음을 소진하는, 심지어 정신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자살까지 이르는, 가족의 지원에 한계를 느낀 다수 대학생들의 긴 고통은 별다른 해결의 기미도 없이 계속되고 있다. 개그와 시트콤의 소재가 된 유행어 ‘40만 청년실업 시대’는 등록금 투쟁 뒤에 버티고 선 또 다른 암초이지만 등록금투쟁에서 그것은 전면화되지 않았다.
아마미야 가린(34)은 청년실업네트워킹센터인 희망청에서 주최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메이데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내한한 일본 ‘로스 제네’(lost generation)의 대표적 아이콘이다. 그녀는 고졸 학력으로 19~24세 시절 프리타(아르바이트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젊은이들)생활을 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프리타노조를 설립했으며 현재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노동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파견직, 노숙자를 통칭하는 말) 운동을 이끌면서 30여권의 관련 저서를 낸 유명인사이다. 그녀는 염색한 긴 금발머리가 눈에 띄는 소위 로리타 패션(성인여성의 소녀스러움을 부각하는 리본, 레이스, 러플을 강조한 패션)으로 대중의 시선을 끌며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헤드뱅잉하는 무질서한 시위, 즐겁고 화끈하게 싸우는 것을 모토로 한 일본의 프레카리아트들을 조직화하고 있다
그런 아마미야가 한국 젊은이들에 대해 가진 인상은 ‘위기감이 약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아마미야에 대한 내용은 시사IN, 2009년 5월 9일자 86호 기사 ‘가난뱅이들의 메이데이’ 참조). 등록금투쟁의 일환으로 삭발을 감행한 한국의 여대생들은 ‘머리는 다시 자랄 것이고... 돈 걱정 안하고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삭발을 했다. 유럽의 1000유로 세대, 한국의 88만원 세대, 일본의 로스제네는 전세계적으로 2000년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 1%에 들지 못한 20대가 워킹푸어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을 표상하고 있지만 최소한 올해 ‘등록금 인하투쟁’에서 그러한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의식과 위기감은 약했다. 신자유주의 고도경쟁에 내몰린 학벌사회 대한민국에서 대학졸업장이 인간적인 삶을 약속하는 최소한의 자격증인 것은 인정하더라도 이들의 등록금투쟁은 스펙관리로 대학 4년을 보내면서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에 순응하는 것과 연장선상에 있으며 학벌사회의 재생산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 위기감’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삭발에는 젊은이 다운 패기와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 삭발의식은 눈물과 함께 거행되었지만 삭발은 이미 1895년 고종이 내린 단발령에 함축된 것과 같은 상징성(국가의 도덕과 가치체제에 대한 부정은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의 부정이라는 상징성)을 완전히 소실했다는 점에서 그다지 파급력이 없다. 눈물은 대중의 동정과 관심은 얻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자각하게 하고 공유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조만간 프레카리아트가 될 수 있다는 공포와 위기감에서 공산주의 소설 <게공선>(1928) 열독에 빠지고 공산당 강령에 대한 관심을 늘려가는 한켠에서 대학의 궁상스러움을 지키기 위해 캠퍼스 곳곳에서 ‘찌개끓이기 투쟁’을 벌이고 ‘도쿄 첨단문화지구인 롯본기를 불바다로!’ 같은 이벤트를 상상해내는 양상과 사뭇 다른 것이다. 로리타 패션과 화장, 긴 금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시끄러운 음악과 헤드뱅잉으로 시위를 이끄는 반빈곤네트워크의 아마미야 카린은 대학입시에 두 번이나 실패한 후 시작된 오랜 프리타 생활에서 자신이 노숙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공포감을 가졌고, 이내 그 공포감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세대적이고 사회적인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존재조건을 사회체제와 구조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 자각과 성찰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삶의 방식을 적극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대의 다수에게 다가올 미래의 암담한 변화를 고민을 통해 전망하고,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조건을 광범위한 연대를 통해 함께 극복하기 위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투쟁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가난뱅이들의 패기와 당당함, 그리고 반란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이 50%를 넘나드는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꿈꾸는 대학생들의 삭발은 그리고 눈물은 수동적이고 순응적이며 문제적이지 않다. 요는 한국의 여성들도 눈물과 삭발의 한계를 벗어나 궁상스럽고, 찌질하고, 지저분하며 시끄럽고 무질서한 그러나 화끈하게 재미있는 새로운, 상상력으로 넘치는 투쟁 방식으로 삶의 조건들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유선영 ● 민우회 이사, 한국언론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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