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8월호 [생협이야기] 존엄하게 살고자 하는 첫 걸음,‘행복한 시니어학교’
[생협이야기]존엄하게 살고자 하는 첫 걸음, ‘행복한 시니어학교’
김연순 ●
작년 9월, 일본 생협 연수를 통해 고령자를 위한 그들의 사업내용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고령자 체험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나의 온 몸에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있다. 고령자가 되면 어떤 신체적 변화가 오는지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었는데, 눈엔 흐릿한 고글 같은 것을 쓰고 귀엔 귀마개, 양 팔꿈치와 무릎엔 모래주머니를 착용한다.
바로 앞의 것도 잘 안보이고, 옆에서 웅웅거리는 것 같은데 뭐라 하는지도 잘 안들려 답답했다. 팔 다리도 내 맘대로 안 움직여졌다. 무엇보다 모래주머니가 든 조끼를 입으니 허리가 절로 굽어졌다. 그런 채로 각각 한 사람의 안내자를 동반하고 가까운 슈퍼까지 다녀오는 것이 과제였다. 허둥지둥하던 중에 주변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만 낙오되는 느낌이었고 왈칵 두려움이 몰려왔다. 거리에 나서니 나의 안내자가 하나하나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것이 그리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신호등의 색깔도 잘 구분이 안가고, 슈퍼에 가서 물건들을 보는데 웬만한 글씨는 보이지도 않았다. 몸은 왜 그리 처지는지 땀이 뻘뻘 나고 금세 지쳤다. 한번 나갔다 오면 그날 하루는 푹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노인이 되면 왜 허리를 구부리고 다니는지, 색깔은 물론 사물도 잘 못 알아보는지, 왜 말을 잘 못 알아 듣는지, 왜 그리도 늦게 걷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를 돌보아 준 안내자에 대한 의지가 거의 절대적이던 경험을 통해 노인의 곁에 누군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철없는 딸인 나는 당뇨 환자로 눈이 잘 안보인다는 엄마에게 나이 들어도 독립심을 키워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니면서 부축은커녕 말로 안내를 했었다. 몇 번이나 되묻는 아버지에게도 속으로 왜 이리 못 알아들을까 하며 짜증 섞인 대답을 했었다. 아! 잘 안 보이는게 사실이고 잘 안들리는 게 현실이었다. 독립심 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로부터의 따뜻한 보살핌이었다.
생전 노인이 안 될 것 같은, 혹은 먼 훗날 남 일이란 생각은 크나큰 착각이다. 우리도 늙고 병들고 더 가난하고 외로워질 수 있다. 우리가 나이 들어서도 인간답게 존엄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지금의 노인들에게도 그렇게 대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노인이 처한 상황, 욕구 등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65세 이상 여성노인을 대상으로 연 ‘행복한 시니어학교’이다. 민우회 활동 역사상 처음으로 노인 여성을 대상으로 연 강좌로 몸과 마음의 건강, 장기요양보험, 종자돈 관리, 더불어 사는 관계에 대한 것을 다뤘다. 참가자들은 최연소 62세부터 최고령 80세 이르는 조합원, 혹은 조합원의 어머니들 약 20여명이다.
강의 시작 전에, “행복하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행복한 시니어학교에 참가한 여성시니어들이 모두 입을 모아 ‘행복하다’를 10번 소리 내어 외쳐 보았다. 그리고 느낌을 물었더니 한결같이 “정말 행복하네요” 하신다. 4회 동안 진행된 시니어학교는 함께 크게 한바탕 웃는 시간, 가슴 뭉클한 채로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시간이 되었다. 첫 시간엔 쭈볏 쭈볏 서로 어려워 하더니, 두 번째 시간부터는 화기애애 자신들의 이야기 보따리도 풀어 놓으신다. 함께 점심 먹으면서 과거를 이야기하다 ○○여고 선후배 사이라며 손을 맞잡으신다. 79세 된 어떤 분은 오전엔 운동하고 오후엔 드럼도 배우신단다. 연륜 때문인지 어떤 분들은 금세 마음을 열어 친구도 만드신다. 서로 먹을 것도 챙겨 주시고 계단을 오를 땐 손도 잡아 주신다.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서만 살았지, 이런 덴 처음이라며 수줍게 웃으시는 분도 계시다. 흔한 ‘코리아 타임’도 없이 모두들 십오분 전엔 도착해 강의실에 앉아 계신다.
그러면서 모두들 한결같이 ‘민우회 생협, 정말 고맙다’고 하신다. 20여 년 동안 주부여성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하다가 처음으로 노인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실수도 긴장도 많이 했다. 무엇보다 생협 사무실 교육장이 비좁아 시청 근처 레이첼칼슨룸을 빌려 진행했는데, 각 지역에서 여기까지 혼자 오실 수 있는 분 보다는 모여서 누군가 모셔 와야 하는 분들이 더 많았다. 전철을 갈아타는데 혹여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했고, 걷는 속도가 다 달라 다섯 분 모셔오는데 두 세명의 안내자가 필요했다. 진행자의 어휘 선택 하나도, 간식 준비도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강사의 목소리 톤과 내용을 주고받는 자세도 중요했고, 용어도 너무 어렵지 않아야 했다. 내용도 있으면서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했다.
4회의 강좌를 마치고 소감과 평가를 나누었는데, 이 분들이 후속모임을 원하신다. 생협에서 생활재로 취급해 주었으면 하는 것도 여러 가지 말씀하신다. 노인용 안경, 지팡이, 요실금팬티, 이빨치료, 의료시설 연계 프로그램, 보험, 짜지 않은 생선, 절이지 않은 생선 같은 것들이다. 노인들만으로 구성된 산지견학 프로그램도 있으면 좋겠다신다. 말씀하신 대로 고령자를 위한 생활재 취급도 준비해보고, 후속모임으로 홍성의 은퇴농장 방문도 추진해 보고자 한다.
현재 여성의 평균수명 83세. 그 나이까지 살게 되는 고령자들이 가장 걱정스러워 하는 것으로 건강(몸과 마음), 돈, 친구를 꼽는다. 중풍이나 치매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돈이 없어 자식들 눈치 보며 기대는 것도 비참하다. 건강하고 돈도 있는데 함께 밥 먹을 친구 하나 없는 것 역시 끔찍하다. 사회는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여 이해 안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뭔가 허탈하다. 지금의 40대는 평균 100살까지 산단다. 건강하고 의미있게, 존엄하게 그래서 행복하게 남은 생을 보낼 준비는 바로 지금부터 시작이다.
‘행복한 시니어학교’는 민우회 생협이 2005년부터 ‘고령화사회에 대한 대응’을 준비하며 비전을 그리고, 올해 ‘행복중심’ 비전선포식을 진행한 후 처음 실시한 구체적 사업이다. ‘행복중심’ 비전은 여성민우회 생협의 조합원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행복을 만들어가고, 그 행복을 각자가 속한 지역사회와 다른 공동체로 확산시키는 중심이 될 것을 약속하는 선언이다. 20년 전에 활동을 시작한 30대 조합원들은 어느덧 50대가 되었고, 40대 조합원들은 이제 60대가 되었다. 생협이 보다 대중화되면서 고령자 조합원도 많아졌다. 또 대부분의 조합원 누구나 자신들의 부모는 고령자이다. 따라서 고령자의 어려움은 먼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이다. 고령사회에 대응하여 서로 힘이 되는 복지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20년 된 민우회 생협이 앞으로 해야 할 역할이지 싶다.
김연순 ● 여성민우회생협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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