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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8월호 [나의 삶, 나의 이야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의 삶, 나의 이야기]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초파 ●
꿈을 꾸었다.
새 한 마리가 내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말을 걸어보려 했는데 날기만 해서 손을 뻗었다. 드디어 두 손 안에 들어오려던 찰나 웃음소리에 잠이 깨어버렸다. 그녀는 날 바라보며 웃고 있다. 늘 그렇다. 잠에서 깨어날 무렵 가늘게 뜬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그녀의 미소 띤 얼굴. 자는 동안 다리를 움찔거렸다거나 입맛을 다셨다는 등의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잠버릇에 대해 누군가에게 또 이야기를 할 것만 같은 얼굴이다. 자는 모습을 수도 없이 도촬 당해왔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지만 나름 도도하고 품위 있다고 알려진 러시안블루로써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번에는 방에 들어 온 풍뎅이가 반가워서 다가가 손을 뻗치려는데 그 녀석이 코앞으로 떨어지기에 조금 당황해서 다른 방으로 달려간 것뿐인데 용케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덩치도 큰 게 작은 곤충이 무서워서 줄행랑을 쳤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며 망신을 주었던 적도 있다. 내가 아무리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꼭 뒤따라가 앞을 서성이며 지켜본다고는 하나 그녀는 나의 프라이버시를 너무 존중해주지 않는다. 난 늘 쿨하고 싶은 고양이란 말이다.
어제는 그녀가 날 자신의 어깨에 둘러업고 밖으로 나갔다. 누우면 처지기 마련인 뱃가죽을 보고 뱃살이라고 우겨대더니 내게 운동을 시켜야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모양이다. 소음과 낯선 사람, 낯선 환경을 좋아하지 않지만 순순히 따라나서는 이유는 단 하나, 풀을 맘껏 뜯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풀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녀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이럴 때는 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푸념을 했다. 이쯤에서 기분을 풀어줘야 할 것 같아 바닥에 한 번 굴러주고 앞장서서 걸어갔더니 금새 히죽 웃으며 사진을 찍어대기 바쁘다. 그녀는 정말 단순한 인간이다. 사실, 그녀가 자발적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행동들 중에는 그렇게 하도록 내가 유도한 것이 많다. 내가 즐겨찾는 자리에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담요를 놓아두도록 했고, 내가 잠을 잘 때에는 소음을 내지 않도록 했으며, 나의 전용 화장실은 하루에 한 번씩 청소해 청결함을 유지하도록 했다. 그리고 가장 허기가 지는 새벽4시에 밥그릇을 채워 두도록 했다. 안마기로 수시로 전신을 안마하여 혈액 순환을 돕게 했으며, 아무리 다리가 저리더라도 내가 그녀의 무릎 위에 올라가서 자는 동안에는 움직이지 않도록 길들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요즘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너무도 자랑스러운 얼굴로 나를 J씨에게 소개했기 때문에 무리해서 친근감을 표시해주었다. 잠자코 안겨 있어 준다거나 조금 부비적거려 주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의리를 지킨 셈이다.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너무나 쉬워서 J씨도 금방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훤히 보이지만 신비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적정거리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녀도 조금만 더 현명하게 군다면 내 털이 축축하게 젖도록 날 붙잡고 우는 일도 없을텐데 내가 나서서 조언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잠자코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러다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초파가 있어서 행복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자면서 보내는 초파.
가끔 잠에서 막 깨어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날 주시할 때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는데 초파도 동의할지 모르겠다. 높은 곳에 앉아 사색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초파가 가끔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왠지 '자유'를 빼앗고, 내가 안전하다고 믿는 작은 세상에 초파를 가둬둔 것만 같아 미안해질 때가 있지만 TV에 종종 나오는 거리 위의 동물들을 보며 눈물을 짜고 있다 보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다행인건 초파가 나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파가 있어서 치유 받고, 많이 웃을 수도 있다. 현관문을 열 때면 늘 긴장해야 하는, 초파가 기다리는 집이 참 좋다. 초파와 함께한 지난 6년은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시간들에서 그 비중이 얼마나 될까. 세상에서 제일 사려 깊고 사랑스러운 고양이 초파가 있어서 나의 따뜻한 마음의 유효기간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다.
초파 ● 우리집 고양이는 초파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저의 닉네임도 초파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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