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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8월호 [문화산책] 마더, 불균질하고 모호한…
[문화산책]마더, 불균질하고 모호한…
스머펫 ●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면,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영화공부를 하고 있다. 나름 학생들에게 약간 과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친구 같은 선생님, 친구 같은 수업”을 그 모토로 삼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잘 나가다가 16주 수업 중에서 9주째가 되면 학생들의 무심함과 무신경함에 지쳐 광분을 하는 어떤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참으로 별 것 아닌 일로 화를 내고 일주일간 지독한 반성을 하고 2-3주간은 나의 얄팍한 애정, 다시 말해 넉넉지 못한 나의 포용력에 좌절하고 절망한다. “어디 가서 학생들을 좋아한다고 말이나 말지”라며 도통 깨지기 힘든 거대한 자학의 연속체를 구성한다. 학기 중에는 항상 신경이 곤두선 채로, 제 정신이 아닌 채로 사는 것 같다. 강의를 하던 첫해에는 내가 정말 좋은 선생이 되려면 아기를 하나 낳아서 키워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을 한 적도 있다. 제자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본능적 사랑이라는 연속선상에 놓으려는, 스승신화와 모성신화를 구성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의 불균질하고 모호하고 때로는 광기 어린 지점 등에 대해서다.
봉준호 감독이 <마더>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한 학교 후배가 ‘너무 구리다’라는 반응을 보였었다. ‘어머니’라는 명사를 가지고 괜찮은 영화를 만들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잠깐만 정신줄을 놓아도, 여성을 억압해오고 있는 모성신화와 모성 이데올로기에 공모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마치 할머니의 삶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듯 보이는 <집으로>(이정향, 2002) 같은 영화를 보아도, 할머니를 통해 불러오고 있는 그 모성은, 도시문명과 대비되는 자연화 된 공간을 통해 근대화의 좌절과 실패를 치유하는 장소로써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모성적 고향을 그려내게 되고 결국, 그것은 본질적인 모성에 일조를 하게 된다. <말아톤>(정윤철, 2005)도 마찬가지다. 어미 얼룩말과 새끼 얼룩말에 대한 남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영화는 동물의 모성을 끌어와 모성은 본능이라는 대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외부와 단절된 자폐아인 아들의 유일한 소통수단인 어머니 즉 희생적 모성을 통해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권적 관계로 극대화되게 된다.
그래서 그 후배의 반응이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나는 그 후배에게 영화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혹시 아냐고? 마더가 퍼킹(fucking)하는 진보적인 이야기가 나올지.” <마더>가 개봉됐을 때, 마더 퍼킹(mother fucking)의 은유적 장면 이외에도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 속 어머니가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죄의식, 불안, 광기 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특수하다면 특수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어머니 노릇이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분명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두려울 것이 없는,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극단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그 빗나간 사랑에 면죄부를 주거나 그 사랑을 숭고하게 그리고 있지는 않다. 이것이 바로 <마더>가 기존의 ‘모성 재현’과 결을 달리하는 지점이자 풍부한 의미망을 만들어내는 지점이다.
<마더>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하고 허여하는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한번 쯤 농약을 먹여 자식을 없애버리고 싶은,1)그리고 그것 때문에 평생 죄의식에 시달리는, 자식의 결백을 믿고 자식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지만 그래서 최고의 선을 행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최고의 악을 행하는 매우 복잡하고 균질적이지 않은 지점을 보여준다. 사랑이긴 사랑이지만 꺼림칙한 사랑, 희생이긴 희생이지만 꺼림칙한 희생. 그렇다면 이 복잡하고 모호한, 매끈하게 봉합되지 않는 이 어머니를 우리는 미쳤다고 말해야 하는가? 기존의 언어에 따르면, 어쩌면 그녀는 미쳤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성 이데올로기로는 그녀의 사랑과 희생을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 “미친 것”이 과연 잘못된 것인가라는 판단의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래, 그녀는 미쳤다. 때로는 제 정신 아닌 것 같고, 대단히 불균질하고 일관적이지 않은 모성이지만 이것이 바로 실제 경험하고 있는 모성이 아니겠는가? 아름답고 숭고한 모성이라는 모성신화가 주입하고 있는 모성이 아니라 “과정” 속의 진실한 순간들에서 추출되는 실제의 모성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 학기 동안 미쳐있던 나에게 <마더>는 격렬한 위안을 주었다. 때로는 얄팍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텁기도 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호하고 균질적이지 않은 애정. 그래서 가끔 이 때문에 죄의식을 갖기도 하지만 그 죄의식조차도 과정 속의 진실한 순간들에서 나온 진실한 감정이라는 것.
나는, 그래서 <마더>의 “미침”에 계속 동참할 것이다.
1) 같은 맥락에서 <4인용 식탁>(이수연, 2003)이 개봉되었을 때, 젊은 엄마들에게 그 영화가 정말 공포스러웠던 이유는 아기를 키우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아기를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던 기억들이 있었는데, 영화에서 그 잊고 싶은 기억들을 불러왔기 때문이라는 인터뷰 기사가 떠오른다.
스머펫 ●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지금 영화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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