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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8월호 [기 획 - 꼰대] 꼰대, 어른의 경계에서 서성이다
[기 획-꼰대]꼰대, 어른의 경계에서 서성이다
재윤 ●
말을 섞는 게 꺼려지는 부류의 ‘어른’들이 있다. 같은 시기의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자들끼리 모여앉아 추억을 나누고 곱씹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들은 늘 ‘우리 때는 안 그랬어. 이것들아’라는 푸념과 질타를 다양한 버전으로 늘어놓곤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드러내는 일상의 가치나 언어에 딱히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 있냐하면 그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이 배어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게다가 별 근거 없이 권위적인데다 종종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도 우편향이기까지 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실망스러운 행태를 보여주는 그들. 그들은 꼰대라는 속어의 일반용례에 따라 그 형식과 내용에서 완벽한 꼰대성을 구현하는 일급 꼰대다.
이 일급꼰대들이 가진 ‘꼰대성’의 기본 정서는 박탈감과 억울함이다. 한때 ‘우리 것’이었던, 어려웠던 또는 잘나가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부여잡고 살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설렁대는 낯선 스타일과 가치들에 맞닥뜨리고, 내가 체험한 역사적 기억이 사장되어 간다고 느끼는 만큼 문화적 소외감은 커지며, 발언권이 줄어드는 불안함 만큼 못마땅함도 커진다.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아집만 커지는 가운데, 이 부글거리는 감정들이 나이와 권위라는 권력과 제대로 어우러진다면 점입가경, 전형적인 일급꼰대의 지름길로 접어든다. 이쯤 되면 지금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자기 객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성찰기능도 뒤틀리거나 망가져버린 채 말을 내뱉기 십상이다.
사실 누구나 나이 들면서 대체로 꼰대가 된다. 나이 들어가며 나와 비슷했던 철없음을 마주할 때 뭔가 어른스러운 척이라도 해야 하는 대응훈련가운데 그렇게 되기도 하고, 트렌드를 따라가고 싶어도 어느 순간 따라갈 수 없고 굳이 따라야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나이 든다고 누구나 꼰대가 되지는 않는다. 결정적으로 쓸데없는 권위의 언어가 나이 듦과 같이 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이를테면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정치적으로 ‘나쁜’가치들을 금과옥조로 섬기며 점잖게 구라를 풀어내는, 일급 꼰대의 자리를 일찍 점찍어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흔한 꼰대의 용례에 따라 기성세대인 선생과 10대 소년소녀들, 주류사회에 안착한 부모와 비판적인 젊은 아이들 같은 구도로 한심한 꼰대들과 그 대항세력을 그리는 건 굉장히 단순한 그림이다.
그런 점에서 특정한 사회·문화·정치적 배경을 연령대에 얽어내는 세대론은 꼰대와 비-꼰대에 대한 좀 더 고급한 ‘구분 짓기’를 하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예컨대 386세대와 그들이 적극적으로 이름 붙여준 88만원세대처럼, 특정하게 호명된 세대의 이름으로 발언권을 얻거나 부여하는 세대론에 전적으로 기대면서 어떤 집단의 꼰대스러움을 비난하거나 옹호하는건 일종의 함정이다.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있어봤자 얼마나 있을까. 고작 띠동갑 정도의 나이차에 세대차가 있어봤자 얼마나 있을까. 세대론은 어떤 국면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도구는 되지만 섣부른 세대론을 들이대며 그들과 우리를 간단히 구분하는 일은 정서적 동질감과 집단적 경험과 공연한 반발감을 무기삼아 큰 차이도 없는 집단 간에 배타적인 결속감과 불통만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차라리 꼰대는 그냥 태도이거나, 세대에 따라 위치지워진 집단성과 문화형식의 영향을 받는 습속화된 태도에 더 가깝다. 꼰대 또는 꼰대성이 느슨하면서도 촘촘하게 나눠지는 세대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태도라면, 나는 일반적으로 꼰대라 불리는 특정집단과 그 특정집단을 꼰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어느 중간쯤에 애매하게 걸쳐있다(고 믿고 싶다). 이를테면 현직 대통령과 그 정부 덕분에 적극 동참하게 된 게시판 댓글의 세계에서, 나는 정치적인 사안을 놓고 보수적인 중장년층을 격하게 ‘까는’ 동시에 20대들이 드러내는 감성적인 태도에는 짐짓 점잔빼며 ‘충고’하는 ‘키보드 워리어질’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한편으론 현안을 놓고 20대를 싸잡아 족치는 386세대 대변자의 말을 보면서 은근 고소해 하다가도 그 386들의 이면을 까발리며 니들이 바로 꼰대라고 일갈하는 20대들을 보면서 386이 아닌데도 왠지 뜨끔거리는, 뭔가 꼰대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그렇게까지 꼰대는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런 애매함.
예컨대 여성주의가 됐든 아니면 모종의 정치이념이 됐든, 어떤 태도를 요구하는 가치와 전제들로부터 특별한 수혜와 혜택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전형적인 꼰대가 되지 않을 만큼의 성찰능력을 가지는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전제의 차이와 다름을 나이나 권위로 해결하려는 태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음과 나쁜 가치들을 모두 쓸어다 꼰대라는 이름의 도가니탕으로 우겨넣으면 마음이 참 편해진다. 피/아도 명확하게 구분되니 싸우거나 비난하기도 좋다. 전형화된 꼰대는, 그래서 의사소통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꼰대들은 이미 충분히 넘쳐나며, 그들과 ‘우리’를 구분짓기는 쉽고 그 경계는 분명해 보인다. 최소한 나는, 우리는 그렇게 무지막지하고 무지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그러면 나는 내가 싫어하고 경멸하는 꼰대를 닮으며 나이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걸까.
사람들은 비슷한 가치와 정서를 공유하는 집단 안에서도 연배와 미시적인 세대구분에 따라 다시 갈리고, 다시 갈리는 집단의 암묵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손쉽게 투덜댄다. 대체로 앞선 경험을 가진 자들은 그 이후의 사람들이 보이는 행태가 좀 못미덥기 마련이다. 여기엔 정치적 이념적 구분 없이 ‘왜 너희는 우리처럼 하지 못하니’라고 말하는 기괴한 세대론이 다시 작동한다. 소위 진보세력에 자기를 위치지어야 안심이 되는 3, 40대는 ‘요즘 아이들’의 무정치성에 허탈해하며, 조직문화에 익숙한 NGO 활동가는 낯선 조직윤리를 가진 후배들의 태도에 당혹감을 토로한다. 심지어 최근에 새로이 등장한 노익장 우파들은 ‘소심한 우파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을 마땅찮아 하며 윗세대로서의 애국충정을 가지고 투덜댄다. 이런 투덜거림이 소통과 이해 없는 타박과 훈계의 언어로 바뀌며 지속되면 한순간에 꼰대아닌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꼰대라고 불리지만 않을뿐 꼰대 급수로 4, 5급쯤은 따놓은 당상이다.
꼰대성은 특별한 정치적 성향처럼 명확한 존재가 아니라, 일상의 곳곳에 잠복해 있다가 몇 가지 환경변수가 충족되면 갑자기 드러나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다. 내가 미워하던 꼰대의 모습을 절대 닮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여기서 슬슬 자신감을 잃는다. 공교롭게도 꼰대로 나이들어서는 안된다는 강박아닌 강박을 심어준 모종의 가치들이 가끔 내 발목을 잡기도 한다. 예컨대 성차와 성차별에 대해 ‘같잖게 지껄이는’ 이들과 싸움이 붙으면, 결코 ‘열폭’하지 않은채 우아한 태도로 특정한 연령대, 특정한 집단에 대해 비아냥대거나 무시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런 우월감의 전제는 ‘나는 최소한 너희들보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이고, 교묘하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국 ‘나이도 어린 것들이 멋도 모르고 설치기는’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다른 부류의 세대로 구분되는 사람들, 또는 후배, 또는 아이들(또는 어떤 집단이 됐든)에게 자극받으면서, 근본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가치들을 평상적으로 유지하는 일과 그를 미시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서 종종 드러나는 꼰대성을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진중한 조언과 되먹잖은 훈계의 언어를 구분하는 경계도 조금씩 애매해진다. 그래서 소통이 필요한데 ‘그분’에게조차 모든 사람이 갈구하는, 이해와 관용과 내공과 배려가 필요한 그 소통이라는게 막상 하려고 들면 결코 쉬운게 아니라는 것도 절감한다.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줄 리는 없으니, 그들에게 가볍게 유행하는 세대론의 한 가지 이름을 붙여놓고 입을 다무는 편이 속 편할까. 아니면, 어른스러움과 꼰대스러움의 경계에서 흔들리면서도 함께 얘기해보자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걸까.
재윤 ● 날씨는 덥고, 언어는 빈곤하고, 나이들수록 사는게 복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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