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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8월호 [기획 - 꼰대] 모스키토 음이 안 들리면 뭐 어때? 난 어른인데
[기획-꼰대]모스키토 음이 안 들리면 뭐 어때? 난 어른인데
노명우 ●
따지고 보면 세대차이는 신기한 현상이다. 세대차이는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 특성뿐만 아니라 민족적 혹은 심지어 계급적 동질성마저도 무력하게 만드니 말이다. 세대차이를 당해낼 장사는 없다. 세대차이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나조차도 어느 새 길거리에서 비정치적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애들’에게 짜증내며 중얼거리는 빈도가 늘었음을 보면 말이다. 내가 보기엔 영양실조에 걸린 삐쩍 마른 몸뚱이인데, 그 새 다리를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강조하는 스키니 진을 입은 ‘애들’ 앞에서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린다. “내가 아저씨라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입은 스키니 진은 미학적으로도 실패야”. 만약 누군가가 내 혼잣말을 듣기라도 했다면 껄껄 웃었을 거다. 사실 좀 구차스러운 변명으로 꽉 차있지 않은가?
내 혼잣말의 전제는 ‘나는 아저씨가 아니다’이다. 참으로 가련한 전제다. 이미 아저씨 소리를 듣기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은 중년 남성이 아저씨가 아니라니 이 무슨 궤변인가. 궤변인줄 알면서도 매일 자신을 부정하는 전제를 반복하는 ‘아저씨-부정강박증’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걸까? 강박의 출처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내가 혹은 우리가 앓았던 ‘피터팬 신드롬’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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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 아는 이기적 존재이며, 생활력이 강할지 모르나 타인에게는 그저 억척스럽게만 보이고, 먹고사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 문화적 교양은 전무하다고 간주했던 아저씨 아줌마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20대 시절 피터팬 신드롬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철이 든다는 게 저 아저씨 아줌마와 같은 사람이 됨을 뜻한다면 차라리 철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20대의 경험을 어찌 나만 갖고 있겠는가. 아마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피터팬이 되겠노라고 결심했을 것이다. 80~90년대의 피터팬 신드롬은 시대의 문화적 현상이었다.
모스키토 음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모기가 날아다니며 내는 소리처럼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기계에서 발생하는 소리라 한다. 나는 이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소리는 17.6khz의 고주파 음을 내고 최장 40미터까지 소리가 전해지지만, 희한하게도 30살 이상인 사람은 들을 수 없다. 모스키토 음을 들을 수 없다면 당신은 이미 생물학적으로는 아저씨 아줌마인 셈이다. 피터 팬이 더 이상 모스키토 음을 듣지 못하게 될 때 피터팬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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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겐 두 종류의 아저씨 아줌마만 있다. 내가 혹은 우리가 피터팬 신드롬을 앓을 수밖에 없도록 강요했던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가 중년 남녀의 대표 품종이다.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들은 사람을 두 종류로만 분류한다. 한 종류의 인간은 무한한 사랑과 이해로 감싸 안아야 하는 식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집단이다.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에게 우리 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은 무한 경쟁의 대상에 불과하다.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에게 싸가지 없는 요즘 애들이란 없다. 이들에게 ‘애들’은 ‘자식’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애들’이 ‘자식’이라는 범주로 포섭되는 순간 요즘 애들의 미학적, 정치적, 사회적 틀림은 이해될 수 있는 무한한 관용의 폭으로 진입한다.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의 특징은 그렇다. 타인에게는 그토록 인색하지만 품안의 새끼에게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모호하지 않은가? 타인과는 무한경쟁을 벌이지만, 품 안의 자식에게는 무한히 헌신적이지 않던가. 대명사 아저씨가 아줌마가 부모인 한은.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가 있다면 또 다른 형태의 아저씨 아줌마도 있다. 20살 시절에 피터팬 신드롬을 앓았던 인간들이 생물학적으로 아저씨 아줌마가 되면서 출현한 변종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여전히 피터팬 신드롬을 앓고 있으면서 마치 모스키토 음이 들리는 것처럼 위장하는 아저씨 아줌마이다.
모스키토 음을 듣는다고 위장하고 있는 아저씨 아줌마는 몸부림친다. 기회 있을 때마다 동방신기의 이름을 다 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슈퍼주니어를 슈주라 불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강조한다. 이 위장세력의 몸부림은 소녀시대의 새 노래가 나오면 새 노래의 안무를 노래방에서 선보이기 위해 무대의 후면에서 피눈물 나는 연습을 하는 측은한 사연에서 절정에 달한다.
위장세력들은 ‘애들’을 따라 하기 바쁘고, ‘애들’을 88만원 세대라 부르면서 사과하기에 급급할 뿐, ‘애들’이 애들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위장세력이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은 그저 자기는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가 아니라는 ‘애들’이 붙여준 훈장이 고작이다. ‘애들’이 부여한 문화훈장을 받고 철딱서니 없이 기뻐하기 이전에 당신들이 따라하고 있는 슈퍼주니어와 원더걸스의 노래에 담긴 얄팍하고 단순한 사고방식을 생물학적인 아저씨 아줌마가 수용할 수 있다면 그건 덜떨어졌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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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키토 음이 들리지 않는걸 부정할 이유는 없다. 모스키토 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건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모스키토 음이 들리지 않는데도, 마치 들을 수 있는 것처럼 행세를 할 필요는 없다. 모스키토 음을 듣고 있는 행세를 하기 위해서 길에서 매일 마주치는 ‘미학적’으로 옳지 않은 모스키토 음이 들리는 ‘애들’의 행태를, 소비자본주의의 화신이지만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선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고 스스로 시민이기를 거부하며 오직 소비자라는 정체성만을 갖고 있는 ‘정치적’으로도 옳지 않은, 타인을 위한 배려와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은 찾아볼 길 없는 신자유주의적 경쟁원리로 자신을 무장한 ‘사회적’으로도 옳지 않은 ‘애들’ 앞에서 모스키토 음이 들리는 것처럼 위장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이제 어른이 되기로 했다. 노무현에 대한 사회적 타살이 백주대낮에 벌어지고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이 한심한 대한민국이라는 ‘후질 대로 후진’ 나라의 시민으로 살면서 분명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일 수는 없다.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들이야말로 아파트 값 상승을 기대하면서, 혹은 떨어지면 어떻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용산에서 봉하마을에서 벌어진 사회적 타살을 방조한 ‘인간’들 아닌가?
좀 전까지 피터팬 신드롬을 앓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나, 성장을 거부하던 <양철북>의 오스카가 어느 날 성장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던 것처럼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겠다.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가 되지 않고도 어른이 되는 방법은 분명 있다.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와 철딱서니 없는 ‘애들’만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는 희망이 없으니. 언제까지 이 땅에서의 희망을 ‘촛불소녀’에게서 찾을 텐가. 어른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가 어른이 되는 길이 더 빠르지 않을까? 언제까지 소녀들에게만 촛불을 들게 할 건가. 대명사 아저씨 아줌마가 아닌 우리들이 어른이 되어 그 촛불을 물려받을 차례이다.
노명우 ●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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