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8월호 [민우칼럼 창] 소시오패스만 살아남는 비열한 세상
[민우칼럼 창]소시오패스만 살아남는 비열한 세상
최정은영(로미오) ●
세상에 귀를 닫고도 살아진다면 그렇게라도 멀리하고 싶을 정도로 언론과 매체는 귀와 눈을 짜증나게 하고 머릿속을 시끄럽게 만들고 삶의 자유와 희망의 싹을 자르고 그 자리에 상흔을 남긴다. 뉴스와 신문, 방송은 거의 똑같은 목소리로 30대 중반을 넘긴 비혼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인 나의 일상과 내 주변의 상황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정작 한숨만 나오게 한다. 잠시 지구별에 여행 와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라 위안을 해야지만 살아지는 일상이다. 지구에서 한 10cm정도 떠서 살아야만 일말의 숨통이라도 트일 수 있는 그런… 한동안 신문도, 뉴스도 일부러 보지 않으면서 산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허탈한 웃음뿐이긴 하지만 도대체 어떤 일들을 얼마나 어처구니없게 떠들어대고 있는가가 궁금해서 신문과 뉴스와 시사토론 등을 눈여겨보고 있다. ‘민주주의의 실종’, ‘불법의 법치’, ‘파시즘’, ‘비정규직법, 미디어법 혼선’, ‘파업’, ‘정리해고’, ‘공공기관의 기획해고’, ‘복직투쟁’, ‘공권력 투입 폭력 진압’ 등 불편하고 실망스럽고 곤혹스러운 일들로 가득하다. 또한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도 너무나 우스꽝스럽다. 목소리는 다양한데 채널은 하나다. 몇몇 언론의 ‘진실’을 위장한 파편화된 사실들만의 접합, 각각의 입장과 그 입장에 대한 맥락들이 권력을 갖은 자들의 옹호를 위해 과감히 삭제된 채 활자화되어 사람들의 생각 속에, 말속에 회자되는 현실들의 재현뿐이란 것이다. 나는 이렇게 문제적인 세상의 시끄러움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입장과 권익을 위해서 희생양을 찾아내고 이용하고, 불평등하고 차별이 만연하는 세상을 만들고 지키는 이들에게 ‘소시오패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졌다. 그 동안 내가 바보스럽고, 당할 만하고, 소수자, 약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옳았다며 여러 가지 나약한 말들로 나를 정당화 시켜왔지만 ‘그들’을 부를 이름이 없어 막연하고 답답했던 것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이름인 것 같아 통쾌해 지기까지 했다. 소시오패스가 판치는 세상…, 소시오패스만 살아남는 세상…, 이 소시오패스들 같으니1)….
누가 소시오패스인가?
사람들은 이름 붙이기를 은근 좋아한다. 특히 ‘병’적이고 소위 ‘비정상’적인 것을 ‘효과적’으로 격리하기 위한 이름 붙이기에는 탁월함까지 보인다. 이는 낙인을 찍기 위해서 이거나, 구분짓기, 차별해서 대하기 위해서이지, 순진하게 ‘그냥’은 아니다. 중심은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할 필요성도 없다. 그냥 ‘중심’, 정상’, ‘당연’하고, ‘옳기’ 때문이다. 더더욱 이름이 붙여질 필요도 없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데, 인간이면 인간이지 노동자,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이 붙을 필요도, 거기에 여성이라는 정보가, 비혼이라는 입장이, 성소수자, 장애인이라는 설명이 추가될 필요도 없다. 소시오패스(Sociopath)는 싸이코패스와 비슷하면서도 아주조금 다르다. 소시오패스는 ‘나름’ 건전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 또 정상적으로 동정심과 죄의식, 충성심 등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선악의 기준은 전체 사회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특정한 집단의 기준과 기대치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2). 꼭 누군가를 닮았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일말의 가책도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 그들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며, 그리하여 타인이나 전체 사회에 대한 의무감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애정과 공감이 사라진 인간관계에서 남는 것은 소유욕과 지배게임뿐이다. 이기는 것, 짓밟고 올라서는 것, 그리고 이용해 먹는 것 밖에 없다3). 듣고 보니, 더더욱 ‘그들’과 닮았다.
‘양심’의 실종
“2009년 여름, 이 땅에서 민주주의는 실종되었다”는 목소리와 함께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일어나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민주주의’의 실종이지만 이것은 사회적 ‘양심’의 실종이다. 항상 이기는 쪽이었고, 항상 지배하는 쪽이거나, 항상 목표를 이루어 왔던 이들, 그들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한 가지, ‘양심’, ‘양심’이란 단지 정직하거나 사회법규를 잘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인류전체, 혹은 모든 생명체)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의무감이기에 ‘양심’ = ‘분노할 수 있는 힘’. 이것이 부재한 이들, 일명 소시오패스다.
소시오패스의 이기는 게임에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이 겪는 사소한 상처, 그러나 이들에게는 참사와도 같은 일들이다. 타인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기진맥진한 의사가 환자를 위해 휴식을 포기하고, 타인에 대한 깊은 애착, 부당함에 분노 하는 힘, ‘양심’이 있어야 한다4). 자신의 성공과 부와 명예를 위해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행동들,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 행동들, 나 몰라라 하는 행동들, 타인을 밟고, 이용하는 행동들, 타인 앞에서 지위와 지식과 권력을 이용해 우월함을 인정받으려는 행동들, 그러한 행동을 일말의 양심의 가책 없이 한다면, 할 수 있다면 ‘당신’도 이미 ‘그들’의 부류에 속한 것이다. “양심이 존재하지 않는 소시오패스는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로 연결되는 능력이 없다.” 또한 자신이 소시오패스인지도 모르며, 여전히 ‘양심’따위는 약한 자들의 핑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들의 동정을 먹고 산다. ‘그들’을 동정하는 단 한명의 사람만 있어도 다시 이기는 게임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쌍용자동차 파업의 문제를 접할 때, 노조의 맥락보다는 사측의 입장에 ‘동정’이 생기는 이들이 있다. 사측이 “공장에 남은 파업 노동자 850여명도 중요하지만 살아남은 3천여명과 20여만명의 하도급 업체, 판매업체 등의 생존권이 노조의 장기 파업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애처로이 말하면, 노조측이 너무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무식하게 파업을 강행하고 있다고 생각이 기울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동정은 ‘그들’을 이롭게 할 뿐이다. 우리의 주변에도 수많은 소시오패스들이 존재하겠지만 경제회복이나 비정규직 사안과 관련하여 구조조정만을 해결책으로 가지고 있는 기업들과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정책과 정부는 다분히 소시오패스적이다.
기업과 노동자와 지역과 사회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 기업만 살리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노동자와 지역과 사회에 대한 ‘양심’의 결여이고,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고 ‘무능력’하게 만드는 소시오패스들의 전형적인 생활습성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도 그대로 소시오패스로 남을 것인가?
최정은영(로미오) ● 여성학 강사, 소시오패스들에게 취약하지 않도록 뻔뻔함과 콧방귀와 사악함을 훈련 중이다.
1) 하도 무서운 세상이라 지레 겁먹고 소시오패스라고 싸잡아 말했다고 후폭풍이 몰아칠까 걱정까지 든다. 이렇게 한줄기 자유로움마저 누릴 수 없다니… 정말 폭폭하기 그지없다.
2)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 Robert D. Hare, 바비악, 이경식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11.02, 48p.
3) 『당신 옆의 소시오패스』, Stout, Martha, 김윤창 옮김, 산눈출판사, 2008. 이 책에서는 우리들 주변의 경쟁적 조직 안에서 발견되는 소시오패스들에 대해 많은 부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너무 승부욕이 강하거나 상사에게 동료에 대한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며 경쟁자를 무능력자로 만들거나 착해빠진 사람의 성과를 가로채거나 양심의 저울질을 거치지 않고 거침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추진력으로 성공도 곧잘 하고, 주변사람들의 두려움과 존경을 받으며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기도 한다고 한다.
4) 지식채널 ⓔ EBS 2009. 6.8 소시오패스, 연출 : 김현우 / 구성 : 박계영, 비디오자료, [지식채널e] 소시오패스 2009.06.08 출처 : 네이버 비디오 / 4분 2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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