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10월호 [문화산책]그건 그냥 집일뿐이야
그건 그냥 집일뿐이야
영은다라 ●
※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내용을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읽지 마세요.
#. 보셨나요? 풍선 타고 집이 떠오르는 그 장면
넋을 잃었다. 입을 헤 벌리고 쳐다봤던 기억이다. 오색 빛깔 찬란한 풍선들을 타고 집이 하늘로 떠오른다. 도시의 빽빽한 빌딩들 사이를 유유히 비껴, 집은 하늘에 당도했다. 이제 커피분쇄기(!)를 조종대로, 커튼봉을 돗대로 펼치고 부웅~! 작은 집이 푸른 하늘 속에 날개를 펼친다.
지난여름에 개봉한 픽사의 새 애니메이션 <UP>(피트 닥터, 밥 피터슨 감독)이 너무나 아름답게 실현시켜준 꿈과 환상에 대해서는 더 할 얘기가 없다. 그들의 멋진 작업에 고마운 마음이 들 뿐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부분이다. 추억과, 추억에서 놓여나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간직하는 방법 말이다.
칼은 어릴 적 자연 탐험 매니아로, 같은 꿈을 가진 씩씩한 소녀 엘리를 만나 인생의 동반자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다. 파라다이스 폭포 옆에서 살 거라는 어릴 적 꿈을 희망으로 삼아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그들의 일생은 따사롭고 행복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결국 모험을 위해 떠나지 못하고 노년을 맞고, 칼은 엘리를 먼저 보내고 그녀와 한 평생 살아온 작은 집에 혼자 남겨진다. 그 집은 엘리와의 추억으로 가득 차, 그에게 있어 엘리 그 자체이다. 세상은 변해서, 그 집만을 섬처럼 남겨두고 사방에서는 고층빌딩이 올라가는 공사가 한창이지만, 그는 ‘고집스런 늙은이’가 되어 집-엘리와의 추억, 그의 과거-을 지키고 앉아 있다. 엘리와 함께하던 따뜻한 나날들과 대비되는, 고독하고 고립된 노년의 일상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 집에서 쫓겨나 양로원으로 보내질 상황에 처하게 되고, 집을 구하고 엘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바랐던 대로 파라다이스 폭포로 집을 옮겨 가는 모험을 시작한다. 집에 풍선을 매달고 날아오른 것이다.
엘리와의 꿈대로 파라다이스 폭포 옆에 집을 내려놓는 것은, 떠난 엘리를 현재에 붙들어두기 위한 칼의 몸부림이다. 그의 마음은 온통 그것에 쏠려, 지금 현재 일어나는 사건과 인연들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다. 하지만 파라다이스 폭포 옆에 집을 내려놓고 난 후, 그는 앨리 모험 책에 쓰여 있는 그녀의 메시지-고마웠다는, 이제 새로운 것을 시작하라는-를 읽으며 내면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는 현재의 모험 속에 뛰어들기 위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힘차게 밖으로 던져버리고 가볍게 다시 한 번 하늘로 날아오른다.
충만한 모험의 마지막 순간, 그와 엘리의 집은 수명이 다한 풍선 몇 개를 달고 천천히 땅으로 가라앉는다. 그것을 보며 칼은 말한다. ‘그건 그냥 집일뿐이야.’
#. 추억에서 놓여나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간직하는 방법
얼마 전에 나는 나의 한 세계를 닫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추억이 쌓여가는 게 무서워서 살아가는 게 두려워지는 기분을 알게 되었다.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이 주는 그 아련한 아픔이 감당이 되지 않아서다. 그 날들이 과거가 되었다는 것이 버겁게 아프고, 조금씩 잊혀져 간다는 것이 벅차게 슬프다.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처음엔 빈 방에 가두어 두었다. 잊어두는 것이다. 그러다 작은 단서들에 그 기억들이 소환되는 순간에는, 복잡한 감정과 기억의 덩어리가 밀물처럼 덮쳐와 나를 장악하고 뒤흔드는 것을 매번 고스란히 고통으로서 견뎌야 했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살아 갈수록 그런 기억이 될 경험들이 점점 더 많이 쌓여갈 것을 생각하면, 그래서 지난 일기나 메일이나 사진 같은 걸 들춰보다가 그 조각들을 발견하는 순간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두려워지는 것이다. 내가 그런 걸 잘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잊어버리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으면서. 벅찬 그리움과 슬픔이 뒤범벅된, 어찌 할 수 없는 아련함 - 그것이 지금껏 내가 겪은 것 중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칼이 엘리와의 추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여는 장면은,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는 과거를 놓아 보냈다. 하지만 추억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완결되어 그의 안에 있다. 그는 버거워하지도 않고,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은 채 건강하게 웃으면서 그것들을 자기 안에 담고 있었다. 집은 망가질 테지만, 그의 안에 담겨진 것은 영원히 안전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놓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네 안에 있다. 그것들은 이미 네가 되었다. 너를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 속에 그 세계가 스며 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분리해 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스며듦이다. 그러니 안심해라. 네가 그렇게 사랑했던, 아니 사랑했던 미워했던 간에 한 때 너의 전부였던 그 소중한 세계는 이미 네 안에 있으니.
영은다라 ● 놓아 보내도,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당신 안에 스며들어 있으니까.
명숙샘을 사랑했고, 또 그래서 아플 이들에게 주제넘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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