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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10월호 [기 획-자발적 소수자]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집을 그리는 목수 ●
집 앞의 감나무 그림자가 툇마루에 드리워진 어느 시월의 아침, 나는 작은 열손가락들에 평생 불변 나만의 신비한 무늬를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참으로 신기하다. 어쩌면 동글동글한 무늬들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찾기 위한 보물지도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자판 두드리는 나의 열손가락이 격하게(?) 소중해진다. 손가락 이야기를 하다 보니 패닉의 <왼손잡이>라는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나를 봐 내 작은 모습을 / 너는 언제든지 웃을 수 있니 / 너라도 날보고 한 번쯤 그냥 모른 척 해줄 순 없겠니 /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 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 난 왼손잡이야!! 나나나나나나나 ~~~
이 노래 참 명곡이다. 나는 이 노래에 감정 이입이 200% 될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다. 나는 튀고 싶지 않다. 낯선 시선도 받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나의 이런 소박한 의지와 상관없이 현실은 녹녹치 않은 게 사실이다. 과연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주변사람 말대로 피곤하게 사는 ‘나’라는 인간이 문제인지? 아니면 사회 시스템이 문제인지?
* 상황1: 동사무소
인감을 신고하러 갔을 때로 기억한다.
직원1 : 이상하다. 신원확인이 왜 안 되지?
쭛쭛쭛씨, 이거 왜 처리가 안 넘어가죠?
직원2 : 어… 이상하네……. 왜 안 뜨지?
나 : …….
직원1 : (두 직원이 이리저리 확인한 후) 혹시 새로운 주민등록증 발급을
안 받으셨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빨리 받으시죠?
나 : (웃으며) 지문날인을 거부하거든요.
직원1, 2 : …….(부담스러운 눈빛)
* 상황2: 은행
직원 : 신분증 좀 주시겠어요?
나 : 여기 있어요.
직원 : 어... 주민등록증 없으세요?
나 : 저는 그거 안 만들었는데요. 운전면허증으로 하면 되잖아요.
직원 : 요즘 규정이 새로 바뀌어서 전에는 되었는데 이번 주부터는 안 됩니다.
나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엊그제까지 사용했던 면허증이…….(어쩌고저쩌고)
직원 : (이리저리 전화한 후) 이건 옛날 면허증입니다.
위조가 많아서 신형 면허증만 가능합니다.
나 : ㅠ.ㅠ
* 상황3: 민원서류 자동발급
곳곳에 있는 민원자동발급기. IT강국 대한민국의 진면목이 여기서도 발휘된다. 그런데 이 기계는 지문인식과 주민등록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처리한다. 혹시나 해서 손가락을 대보았다. 역시나 나에게는 꿈쩍도 안한다. ㅠㅠ
사실 내가 왜 지문날인을 거부했는지 돌이켜보면 거창할 것도 없다. 한 개도 아니고 열 개를 다 찍으란다. 왜 다른 나라에서 사라지는 것을 우리만 전산화시켜 관리 하냐고 물어봤지만 애꿎은 직원들이 무슨 잘못인가? 행정 편의와 비용 절감이라는 장점(?)을 앞세워 인권이 뒷전으로 밀리는 걸 보니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모든 사람을 잠재적인 범죄인으로 취급하여 생체정보를 얻는 것 자체가 보편적인 사회 정의에도 맞는가? 하는 의문도 들고 말이다.
내가 안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한 지문날인 거부, 산과 자연을 파괴하고 만든 스키장을 싫어하기에 스키 안타기, 20년 가까이 지켜오고 있는 코카콜라 안 마시기…….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에서 벗어나 처음의 마음이 변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금석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다. 스키 안타기 덕분에 직장에서 단체 행사의 행선지가 바뀌어 따가운 시선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들은 내가 지문날인을 거부해서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것을 모른다. 가까운 지인이나 동사무소 갈 때마다 직원들이 아는 정도다. 뭐 자랑할 일도 아니긴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 보통 비슷한 반응이다. ‘삐딱한’ 내지는 ‘까다롭고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구나. 혹은 이런 사람이 주변에도 있구나하는 신기함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도 없거니와 다행히 내가 가지고 있는 운전면허증, 여권, 국가기술자격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서 크게 불편함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노파심이 드는 게 있다. 위에 열거한 모든 신분증과 주민등록증을 죄다 하나로 전산화 시켜서 묶으면 어찌하나. 인권 선진국은 꿈도 안 꾸지만 우리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걱정이 드는 건 사실이다. ㅠㅠ
나의 소중한 열손가락의 동글동글 신기한 무늬들을 보면서 지속가능한 딴따라 질을 지향하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별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니가 깜짝 놀랄 만 한 얘기를 들려주마 /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 하면 /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 뭐 별다른 걱정 없다 /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때로는 나또한 사회와 세상에게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별일 없이 살게 내버려두라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 사회가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식으로 다수 안으로 들어와야 별일 없이 살수 있다고 말하듯…….
집을 그리는 목수 ● 집을 주춧돌부터 그리는 목수처럼,
작고 소중한 원칙과 가치들이 살아 숨쉬는 지속가능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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