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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10월호 [민우ing]바/꿔/라, 그냥 두기에는 병폐가 많다
바/꿔/라, 그냥 두기에는 병폐가 많다
이임혜경(오이) ●
살인, 폭행, 절도, 사기... 우리는 이것을 ‘범죄’라 부른다. 사회적으로 해롭거나 위험스러운 행위는 무수히 많지만 이 중 특히 해롭다고 간주되는 행위를 형법에 규정해놓고 범죄라 칭하며 벌한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 범죄이고, 그 처벌의 정도, 종류를 규정한 법률이 바로 형법이다.
그런데 순간 의문이 든다. 수많은 위험스럽고 해로운 행위 중 어떤 것을 형법에 포함시킬지, 그 처벌의 정도를 어떻게 할지 등을 정하는 문제 말이다. 이를 결정하는 데는 많은 관점과 시선, 사회적 관계,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소지가 있지 않은가. 법률 그 자체가 문제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지금까지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법은 객관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법률 개정과정에서는 많은 토론과 논의, 의견개진과 수렴의 절차가 필요하다. 이런 고민의 시점에 ‘형법 개정’이라는 큰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졌다.
한국의 형법은 1953년에 제정되었고 변함없는 채로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그 사이 개정 시도가 있었지만 지엽적 개정에 그쳤다는 평가들이다. 그 사이 시대의 변화, 문화와 의식, 가치관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더불어 형법에서 ‘범죄’라 규정된 행위 중 어떤 부분은 의미가 없어지기도 했고 다르게 바라봐야 할 것도 있고, 범죄로 새롭게 규정해야 할 행위도 생겨났다.
때문에 07년 6월, 법무부는 형사법 개정 특별 분과위원회를 확대, 개편하여 형법 및 형사특별법 분야의 불합리한 규정을 개선, 새로운 범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취지하에 형법 개정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이런 개정안 작업을 거쳐 2010에는 형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형법, 형사특별법 개정운동을 펼쳐온 여성단체에게 형법을 어떻게 개정할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90년대 초, 형사특별법으로 분류되는 성폭력특별법의 제정 운동은 성폭력을 순결과 정조의 문제로 규정짓는 기존 형법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제정운동 3년 만에 법이 통과되기는 했으나 당시 성폭력이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임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했고 전면적인 친고죄 폐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강간의 대상, 폭행, 협박과 저항여부에 대한 문제 등의 한계를 남겼다. 이후 민우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개정운동을 펼치며 여성의 경험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기존의 법률과 관행에서 여성의 경험이 어떤 식으로 배제되는지를 알리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다. ‘객관적’이라는 법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 ‘합리적’이라 불리는 남성의 시선으로 법률을 적용하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경험하면서 변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성폭력특별법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법의 개정보다는 원칙법인 형법에서 성폭력범죄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 성폭력에 관한 통념과 해석, 법 관행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또한 성폭력범죄가 형법의 예외에 속하는 특별법의 형태보다는 힘이 센 형법으로의 전환과 함께 형법 규정상의 성폭력범죄 구성요건의 변화 등을 주장하며 토론하고자 하였다.
과연 이런 노력이 형법 개정을 앞두고 있는 현재, 시대와 의식들의 변화와 함께 어떤 울림을 가질 것인지 여전히 물음표이다. 그리고 목소리에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앞으로 어떤 노력을 더 해야 할 것인가는 과제로 남아있다.
형법 개정에 대한 여성 주의적 관점의 의견 반영이 무엇보다 중요 했기에 지난 6월, 한국여성민우회를 비롯한 9개의 단체들1)로 구성된 형법개정관련 여성인권단체연대회의는 성폭력, 가정폭력, 간통죄, 혼인빙자간음죄, 음란물, 성매매 등에 대한 형법개정 방안에 대한 의견서를 법무부에 제출하였다.
성폭력범죄에 관한 의견 중에는
1) 성폭력 범죄 구성요건의 보호법익은 정조가 아니라 성적자기결정권의 보호라는 것,
2) 기본적인 강간죄 규정의 객체를 여성에서 사람으로, 유사 성교행위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조정하는 것,
3) 구체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아니더라도 가해자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적 요소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사례들이 많다는 점 고려하여 단순 폭행, 협박을 행사한 경우와 소위 ‘저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을 행사한 경우를 구별하여 후자를 가중처벌 하는 방식,
4)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처벌이 가능한 친고죄의 규정이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명예를 보호 보다는 가해자로부터 고소 취소의 압박에 시달리게 하고, 도리의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이러한 과정에서 폭행, 협박, 강요와 같은 2차 범죄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에 기반을 두어 비신고죄로의 개정 요구 등이 있다.
또한 가정폭력범죄의 형법 편입에 대한 의견, 간통죄와 혼인빙자간음죄의 폐지, ‘음란’이라는 단어의 정치적 함의, 음란물의 판단기준의 모호함에 대한 문제제기, 성매매법의 형법 체계로의 편입과 관련한 의견 등을 담았다.
물론 이 의견 중에는 성적자기결정권, 성매매를 둘러싼 담론 등 토론이 필요한 쟁점이 많다. 지금은 이것이 답이라 외치는 동시에 토론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 서 있는 그 자체가 중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또한 형법 안에는 가부장적 성문화가 만들어 낸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형제도의 존치문제, 형벌의 종류와 내용, 국가보안법의 문제 등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관을 점검해보게 하는 논쟁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며 외치고 죽었지만, 살아있는 자라면 특정 사악한 집단이나 권력을 잘못 휘두르는 자들을 위해 쓰일 수도 있는 법을 변화시킬 의무와 책임이 있기도 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곤 한다. 잘못된 법은 고쳐져야 하고, 악법은 법이 아니지 않는가.
형법개정의 기회가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1)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민변여성인권위원회, 성매매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성폭력상담소(가나다 순)
이임혜경(오이)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소장,
도도하게 떠 있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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