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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12월호 [나의 삶, 나의 이야기] 그녀 미술하다
그녀 미술하다
윤정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 작업실
11시쯤 작업실에 도착한다. 들어가기 전, 문앞에서는 코끝을 자극하는 기름 냄새와 나무 냄새가 난다. 익숙한 냄새에 나의 몸은 반응하고,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외딴 섬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아무와도 소통 없는 열 시간 남짓을 혼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창문 사이로 햇살과 가을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슬그머니 들어온다. 습관적으로 노래를 틀고, 물을 끓인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있기를 반복하며 한두 시간쯤 지나서야 그림그릴 마음의 준비가 된다. 붓을 빨고, 물감을 짜고 전날 그려 놓고 간 캔버스를 바라본다. 붓에 잔뜩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부빈다. 물감이 옅어질 때쯤 다시 물감을 찍어 그리기를 반복한다. 집중이 되지 않을 땐 다른 생각들을 해댄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오려고 애쓰지만 무엇이 내 마음을 어지럽힌 단상인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붓을 든다.
# 작업
요즘 집중하고 있는 작업은 ‘몸 관찰’이다.
왜? 그동안 나의 몸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을까?
거울 앞에서 벗은 나의 몸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솔직하게 비추고 있지만 거울은 고개를 돌린다.
난 견디고 있다. 즐기고 있다.
# 빨간 뻔데기
붉다 못해 피 같은 애벌레들이 번데기가 되어있다. 그 속에서는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고 있다. 이전의 자신의 몸이 없어지고, 다른 몸으로 진통을 겪으면서 변화한다. 어떻게 바뀔지는 우리도, 다른 이들도 아무도 모른다. 바뀌더라도 또다시 탈피하고 변태 과정을 겪을 것이다.
빨간 뻔데기는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 미술 세미나 ‘이름’이다. 너무 거창하게 이름에 의미를 부여했나?
목마른 사람들이 우물을 판다고, 여기 모인 작가들과 기획자, 이론가들은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논의가 척박한 미술계에서 여성적 감수성과 젠더감수성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이야기하며 꿈틀거리기 시작한 세미나이다.
우리들도 이제 막 번데기가 된 애벌레들이고, 변태를 하고 싶은 다른 애벌레(님)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
민우회 안에서도 미술모임이 생겨서 빨간 뻔데기와 함께 문화판을 벌일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여성주의’를 마음에 안고가는 이들에게는 중요한 것이기에 흩어져 있는 미술하는 그녀들이여, 만나고 싶다.
빨간 뻔데기 까페 주소 : http://cafe.daum.net/redcrysalis
# 꿈
며칠 전에 친구가 나에게
“너는 꿈이 뭐냐?”
라고 물었다.
“예전에는 술술 대답도 잘했는데, 한해, 한해 지나갈 수록 잘 모르겠고, 지금은 대답하기 어려워.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도 모르겠어. 그러는 너는?”
“나는 돈 많이 버는 작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하는 친구가 부러웠다. 목표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가슴 뛰게 하는 글을 보았다.
누군가 김광석의 노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라.
그는 듣는 이를 압도하려 들지 않는다.
그의 노래에는 틈이 많다.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여백 속에서
스스로를 반추하게 만든다는 데에
김광석 노래의 진정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멋진 평가인가? 나도 여백과 틈이 많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 이것이 나의 꿈이다.
윤정 ● 상수동 달링스튜디오에서 작업 中 오랫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불안과 초조함을 한 겹 벗어버리고 자유로워졌다. http://choiyunj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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