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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12월호 [기획- 공간을 말하다]공간에 대한 재해석, 올레는 어디에나 있다
공간에 대한 재해석, 올레는 어디에나 있다
안은주 ●
“산티아고 길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의심과 불안, 걱정과 근심을 떨치고 일단 길 위에 서라,
그리고 한발을 내디뎌라, 언젠가는 목적지에 닿을 터이니.
그 길을 처음 떠날 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올레를 열었다.”
(사)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연 제주올레 길은 이제 연 20만 명 이상 걷는 길이 되었다. 270킬로미터에 이르는, 바다와 산과 마을을 낀 트레킹코스, 제주올레는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속도와 소음과 공해에서 벗어나 행복과 위안과 평화를 맛보는 길이 되고 있다.
지금은 걷기 위해 제주도를 찾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 되었지만, 서명숙 이사장이 제주올레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주변에서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걷기 위해 누가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찾겠는가. 그건 앞으로 10년 후에나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라고. 그러나 서명숙 이사장은 확신이 있었다.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걸었던 산티아고 길에서 그녀가 행복과 평화, 위안을 얻었던 것처럼 걷기 위해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제주올레가 인기를 끄는 비결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 가지 비결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마음을 담아 만든 길이라는 데 있다. 서명숙 이사장은 산티아고 길을 걸은 지 33일째 되던 날, 한 영국 여성과 동행하게 되었다. 멜리데 마을에서 유명한 ‘뿔포’(문어요리)를 와인과 곁들여 먹고 마시면서 서이사장은 그 영국 여성에게 말했다. ‘이 길에서 너무나도 행복했기에 적어도 5년에 한 번씩은 산티아고 길을 걷겠노라’고. 그랬더니 그 영국 여성은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이 길에서 커다란 행복과 평화, 위안을 받은 우리는 그 행운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줘야 할 의무가 있다. 모든 사람이 이 먼 곳 산티아고까지 오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각자의 까미노를 만들자”라고 제안했다. 그 영국 여성의 제안처럼 자기가 받은 위안과 행복, 평화를 나누기 위해 제주올레 길이 시작된 것이다. 자기가 얻은 것을 더불어 나누고 싶어 하는 여자의 마음이 담겨 있는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걷는 사람 대부분 평화와 행복을 얻고, 그 평화와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제주올레를 추천하고... 그런 마음들이 모여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제주올레를 찾고 있는 것이다.
방문객 숫자가 표현하는 성과보다 더 주목해야 할 변화도 있다. 제주도가, 서귀포시가 제주올레를 만나면서 얻은 가장 큰 결실은 제주가 가진 자연과 문화라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살리면서 세계적인 여행지로 거듭나고, 그 혜택이 지역사회에 고루 돌아가게 하는 착한 여행의 성공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제주올레로 인한 서귀포의 관광 수익은 거의 대부분 서귀포 지역주민의 소득으로 이어진다. 관광객은 ‘관광 명소’만 흘낏 보고 지나가고, 골프 여행객은 골프장만 슬쩍 왔다 가지만, 올레꾼은 작은 마을 구석구석까지 찾아가고 그 마을의 아름다움과 문화를 가슴에 담아 간다. 올레꾼은 지역민이 운영하는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자고 지역민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점포에서 먹을거리를 해결한다. 이동할 때는 지역 택시나 버스를 이용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지역 농민이나 어민이 수확한 농수산물을 구입하거나 택배로 부친다. 제주올레를 찾는 올레꾼이 늘수록 제주다운 문화와 가치를 더 많이 알리고, 서귀포 시민의 소득도 높아지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택시 기사를 비롯한 지역 주민들은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을 만날 때마다 “제주올레 덕분에 택시 손님이 많아지고, 지역 식당들이 활성화 됐다. 제주올레가 서귀포 서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라며 고마움을 표한다.
올레 길이 활성화되면서 올레 길에는 올레꾼을 대상으로 한 민박이나 노점이 계속 늘고 있다. 홀로 사는 할망들이 남은 방을 이용해 올레꾼 대상의 민박업을 하는 할망숙소, 소일거리 삼아 파전과 막걸리를 파는 할망, 봄 내내 뜯어다 말린 고사리와 정성스레 빚은 솔잎 주스를 팔러 나온 할망…. 지난여름 문을 연 올레 길의 할망숙소는 여름철 내내 방이 모자라 손님을 못 받을 정도로 올레꾼이 넘쳐났다고 한다. 올레 길에서 노점이나 할망숙소가 늘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인 것 같다. 할망들은 올레꾼들과 교류하며 소일거리로 용돈벌이까지 할 수 있으니 좋고, 올레꾼들은 제주의 인심과 맛을 제대로 즐기는 진짜 속살 여행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제주올레는 올레 길로 인한 혜택이 더 많은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1사1올레 마을 맺기 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런 의도였다. 올레꾼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주민뿐 아니라 모든 주민들이 올레 길의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올레 길이 통과하는 마을과 기업들을 연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서울 세브란스 병원과 자매결연을 맺은 1코스 시작점 시흥리 주민들은 이미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세브란스 병원은 시흥리 주민 가운데 형편이 어려운 이를 대상으로 무료 시술을 시행한 바 있으며, 지난여름에는 마을 주민 모두와 올레꾼을 대상으로 무료 검진을 실시했다. 시흥초등학교에는 수백권의 장서를 기증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11코스 종점인 무릉2리의 경우에도 올레로 인한 자매결연 혜택을 톡톡히 볼 것 같다. 무릉2리와 자매결연을 맺은 공기 청정기 회사 벤타코리아는 ‘무릉 외갓집’이라는 무릉2리 마을 브랜드를 만들어 주고,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전국으로 판매하는 온라인 유통망을 구축해주고 있다. 올 12월 안에 오픈할 ‘무릉 외갓집’은 무릉리 주민들이 생산한 농수산물을 전국으로 판매해 무릉 주민들이 판로 걱정 없이 농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모두의 노력으로 제주올레는 자연과 문화, 지역민과 여행자 모두 행복해지는 새로운 여행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관광객은 구경하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일 뿐이지만 여행자는 만남과 배움을 위해 여행하는 사람이다. 올레 길을 찾는 여행자들은 구경하기 위해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아니라 제주의 자연과 문화, 제주인을 만나고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제주를 찾는 여행자이다. 이는 제주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늘리는 일이기 때문에 당장의 관광 소득보다 더 큰 결실이 될 수 있다.
‘올레 붐’은 제주에서만 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걷는 길을 내겠다며 제주올레를 벤치마킹하고, 제주도로 답사를 온다. 이미 전국 각지에 걷는 길이 생겼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걷는 길이 많아진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걷는 길이 늘고, 걷는 이들이 늘어나면, 그 길 위에서 평화와 행복, 위안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
올레는 제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올레는 어디에든 있다. 자신이 나눈 것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려는 따뜻한 마음, 그 마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올레가 될 것이고, 올레가 늘어나는 만큼 우리 사회는 더 넉넉하고 따뜻한 곳이 될 것이다.
안은주 ● 15년 동안 <시사저널> <시사IN> 등에서 경제, 과학 기자를 하다 그만두고, 2008년 9월부터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기획실장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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