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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12월호 [민우칼럼 창] ‘폭탄 스트레스 말고는 별다른 스트레스는 없다’는 그녀
‘폭탄 스트레스 말고는
별다른 스트레스는 없다’는 그녀
박선영 ● 한국여성민우회 정책위원
오늘은 지난 1년간 함께 동료로서 일했던 사람과 모 대학 앞에서 점심약속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나에게 ‘폭탄 스트레스 말고는 별다른 스트레스는 없다’는 낯설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얘기를 웃으면서 했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스트레스 말고는 다른 걱정은 없다니... 그래, 어찌 보면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라지만, 어떤 고민과 걱정도 압도하는 것이 바로 죽음의 공포일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것이 단지(유일한) 스트레스라고 말하는 상황이라니, 나의 상상력으로는 잘 이해가 안됐다. 물론, 너무나 위험한 지역인(내가 보기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유엔직원으로 근무하는 사람다운 발언인 것만은 틀림없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 유엔숙소가 탈레반에 의해 무차별 공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녀가 떠올랐고, 필자는 그녀의 훤하게 웃는 얼굴과 그녀의 예쁘고 어린 아들이 생각나서 너무나 무서웠다.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를 직접보지 않고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녀의 ‘폭탄스트레스’이야기는 일상적으로 필자가 마주하는 다양한 스트레스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무수한 관계망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가족, 직장 등 공적 또는 사적인 관계 속에서 다양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로 인해 화도 나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물론 다양한 종류의 스트레스를 단지 정도나 경중의 잣대로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죽음도 불사할 만큼 절박한 문제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번쯤 고민하고 스쳐지나갈 문제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다른 어떤 삶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을 가져오는 문제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라면 경험하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살아가지는 않는다. 주변에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게 될 때,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통해 특정인들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가시화될 때, 우리는 죽음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올해는 유난히도 가슴 아픈 죽음들이 많았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튜브를 놓쳐서 익사한 아이, 운동하다 심장이 멎은 40대 가장, 유방암으로 투병하다 숨을 거둔 여성운동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을 때까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다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죽음들이 있었다. 그러한 죽음들은 죽은 이에 대한 안타까움, 그 주변 혹은 많은 이들의 슬픔과 고통, 더 나아가 나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게 만들었다. 현재의 나의 삶,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자 하는가, 라는 질문들을 다시금 던져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일상은 이러한 삶의 근본적인 물음들을 이어갈 틈도 없이 또다시 바쁘게 흘러갔으며, 그들의 죽음은 점점 나의 일상 속에서 잊혀져갔다.
그러나 ‘폭탄테러’의 위협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그녀를 만나면서, 일상 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위협을 멀리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확인하게 된다. 최근의 우리사회의(다른 나라도 비슷할 수 있겠지만) 신종플루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바로 죽음이라는 위협이 우리의 일상 속에 침투할 때, 우리의 일상적 삶에 어떠한 변화를 주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불가피하거나 인간의 힘으로 불가항력인 죽음이 존재한다면, 특정 집단의 목적과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초래되는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테러로 인한 공포나 죽음의 위협은 분명 인간의 힘으로 통제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의 공포나 위협을 더욱 가중시키는 위험한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는다. 탈레반이 유엔직원 숙소를 공격한 것은 부정선거를 용인한 미국에 대한 경고였다고 한다.
미국에 대한 경고를 그 일과는 무관한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그것도, 일을 떠나 자고 먹고 안식을 취하는 공간을 공격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죽음, 아니 이로 인한 공포와 위협은 진정 누구를, 아니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적어도 인간이 초래하는 죽음, 불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확대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선영 ● ‘386’의 촌스러움을 떨쳐버리려고
무던히도 애쓰며 사는 지식노동자,
주위 사람들을 예뻐하며 살고 싶은 중년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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