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나의 삶, 나의 이야기] 나를 통과해 갔던 생각의 편린
나를 통과해 갔던 생각의 편린던 생각의 편린
임정우(고래씨)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이 기회에 삶의 어느 한때 내 안에 머물렀던 생각몇 가지를 주섬주섬 모아 보기로 했다. 여러 조각의 헝겊을 대어서 만든 보자기 같은 글이 되었지만, 내 삶을 말해 주는 그 무엇이 또한 관통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긴 글을 쓰려니 내 사유의 호흡이 짧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은 ‘좋아하는 사람 따라 하기’의 역사인 것 같다. 좋아하는 친구가 고전에 관심이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읽었고, 좋아하는 분이 서예와 전각을 하는 것을 보고 나도 붓과 철필을 들었으며, 좋아하는 친구가 사진 찍는 것을 보고 나도 카메라를 장만했더랬다. 그뿐이랴. 좋아하는 분이 좋아하는 사람이면 나도 덩달아 좋아했고, 좋아하는 친구가 만년필 쓰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했다. 앞으로도 또 어떤 사람을 만나 그를 따라 하게 될까? 그러고 보면 내 몸에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는 셈.
사회학자의 눈, 철학자의 눈, 시인의 눈, 기자의 눈…….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볼 때면 이런 식의 유형화를 머릿속에 그려 보고는 한다. 이 중 가장 탐나는 것을 꼽으라면 내게는 철학자의 눈과 시인의 눈이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내가 가장 위협적으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오해받는 일이다. 나는
‘잘못 읽히는 것'보다는‘차라리 안 읽히는 것'을 원한다." 말이란 늘 미끄러지기 마련이다. 말하는 주체와 말 사이에서도 서로 수없이 미끄러지거늘, 하물며 그 말을 듣는 타인과는 더하지 않겠는가. 오해는 어쩌면 언어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잘못 읽히느니 차라리 안 읽히는 것을 원한다는 말은 욕심 같아 보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오해가 최소가 되도록 할 수 있는 한‘섬세하게' 말하는 수밖에는. 물론 섬세함이 통 소용없는 작자들도 있지만. 언어에 대한 자의식도 바로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닐까나 싶다.
월급날이 내일모레로 한 푼이 아쉬운 마당에 야생화 백과사전 하나를 사 버렸다. 꽃에 관심 많은 지인들께 일단 자랑 문자를 보내고,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한 장한 장 넘기며 본다. 꽃을 보면 이 우주에 신이 없다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어릴 적 시골집에는 유난히 감나무가 많았다. 집을 삥 돌아가며 감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사과나무며 앵두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도 한두 그루씩 있었다. 또한 ‘김나무'라고 하는 것도 두세 그루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욤나무라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하여튼 세간 살이는 남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런 쪽으로는 우리 집이 상당히 부자였구나 싶다. 그런 나무들과 더불어 자랐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다.
남들과 서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영향(影響)’이란 말에는 단독자로서의 나를 넘어‘다른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존재란 꼭 사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연일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고 우주일 수도 있는, 훨씬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관계와 죽은 관계를 구분해 주는 핵심은 바로 그‘영향'이 아닐까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영향’은 곱씹어 보면 참 아름다운 말이다.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아이들 싸움 붙이기 좋아하는 어른들이 꼭 있었던 것 같다. 한번은 명절이라 큰방에 일가친척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는데, 누군가가 나보고 고종사촌 녀석이랑 씨름을 해 보라고 했다. 하라니까 하긴 했는데, 그 녀석이나 나나 어른들의 부추김에 없던 승부욕과 호전성이 발동되어 기어이 이기고야 말겠다는 식으로 달려들었다. 우리는 심각해서 죽겠는데, 어른들은 재밌어죽겠다는 식이었다. 누가 이겼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데, 암튼 서로 분기탱천했다는 것은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을 놓고 어른들이 그게 할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화주의적인 감수성이 몸에 배게 가르쳐도 시원찮을 판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마음에 호전성을 불어넣어 기어이 서로 할퀴게 만들다니. 만일 그런 것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아이라면 그 마음이 얼마나 황폐해질 것인가. 끔찍한 일이다.
호주제 폐지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그렇게 되면 좋기야 하지만 그저 먼 훗날의 일처럼 여겼다. 그만큼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는 가부장적 문화의 뿌리는 대책 없이 깊어 보였던 것. 그러나 그것이 현실화되는 것을 보면서 ‘아, 아무리 완고해 보이는 현실도 상상하는 만큼 녹여 낼 수 있겠구나’했다. 지금은 비록 공상에 불과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모든 변화는 결국 이런 상상의 집적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라인홀트 메스너라는 유명한 산악인이 있는데, 산을 오르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려고 오르지 않았다. 나는 유토피아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유토피아'라는 단어가 난생 처음으로 찌릿하게 다가왔다.
직선과 곡선, 날카로움과 부드러움, 과학과 시, 보수와 진보, 다수와 소수, 집단과 개인, 세속성과 낭만성, 말과 침묵, 수직과 수평, 양과 음, 단순성과 복잡성, 경쟁과 배려, 있음과 없음, 밝음과 어둠, 야망과 무욕……. 현실에서는 결국 전자의 승리로 끝날 때가 많아 보인다. 후자는 전자에 대해 약간의 해독제 구실만 하는 것 같다. 언제나 지는 투쟁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때부터는 그런 투쟁이 싫어져서 세상을 등지고 돌아앉고 싶을 때도 많았다. 패배주의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허나 마음만 등질 뿐 몸까지 그러지는 못 하겠더라. 결국 몸과 마음의 그 거리가 내 슬픔의 원천인 듯도 하지만, 몸마저 돌아앉으면 이 생에 대해 참 미안할 것 같아서. 어쩌면 생에 대한 연민의 힘으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새벽이다.
낮의 삶을 지나 밤길을 어슬렁거린다. 언제부터인지 내게 밤은 낮의 여분이 아니라 오히려 낮을 묵묵하게 받쳐 주는 근원적인 시간처럼 느껴진다. 사실 어둠을 통과하지 않은 밝음이란 얼마나 가벼운가.
20대 시절, 나는 문화적, 지적으로 꽤나 강한 호기심에 불탔다. 그래서 철학아카데미나 민예총 같은 곳을 기웃거리며 강의도 듣고,《 키노》같은 난해한 잡지를 읽으며 심오한(?) 영화 골라서 봤고, 안동림의《이 한 장의 명반》같은 책을 바이블 삼아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또 교보문고나 헌책방에는 이틀이 멀다 하고 들락날락했으며, 퇴근 후에는 청계천을 오가며 희귀한 영화를 수집하는 데도 몰두했고, 먹물들과 있으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저런 담론을 쉽게 입에 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낯부끄럽고 밥맛이었겠다 싶은 게 많다. 그럼에도 그런 집중과 열정의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내면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기에 그냥 빙그레 웃고 만다.
이제 내게는 그런 뜨거움이 없다. 물론 여전히 책과 영화와 음악을 가까이 하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탐욕적으로 취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어도 지금은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잡는다. 오늘은 이 책을 보다가 내일은 저 책을 보다가 그렇게 찔끔찔끔 건드려 놓기만 한 것도 수두룩하다. 음악도 그냥 기분에 따라 골라 듣는다. 오늘은 은방울자매를 듣다가 내일은 생뚱맞게 찬송가를 듣다가 또 다른 날은 정악을 듣다가. 몸도 마음도 어딘지 느슨하고 미지근해졌다. 여전히 나이롱스럽고 취향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모든 것을 대하는 마음이 변한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렇게 헐렁해진 나 자신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어떤 강박에서 풀려난 기분도 들고, 아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대상을 자연스럽게 향유하는 것임을 가슴으로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런저런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 얼마나 느끼한 것인지도 알겠기 때문이다.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미지근하면 미지근한 대로 인생은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고래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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