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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4월호 [나의 삶, 나의 이야기] ‘동기’도 아닌, 그렇다고 ‘여자’도 아닌
[나의 삶, 나의 이야기] ‘동기’도 아닌, 그렇다고 ‘여자’도 아닌
월경(越境)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위와 같은 조건은 식당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부모님을 둔 나에게 매력적인 조건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여학생을 남학생 총원 대비 10% 미만으로 규정한다.’는 조항이 ‘여자인 네가 이 학교에 오려고? 각오해야 할 거야.’라고 경고하는 듯했지만, 그 때의 난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안 됐다.
2006년 봄, 난 oo 해양대학교 해사대학에 입학했다. 해사대학은 상선*에 승선하는 선원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입학 후 일주일간의 적응교육 기간을 거쳤다. 적응교육의 목적은 해사대학 신입생으로서 해사대학의 전통을 익히고 동기간 단결력을 도모(동의되지는 않지만)하는 데 있었다. 매일 지옥 같은 훈련을 받았고, 물도 못 마시게 했으며 화장실도 선배의 허락을 받아야만 갈 수 있었다. 웃어서도 안 되고, 24시간 내내 긴장하며 진지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으며 자는 도중 언제라도 선배가 깨우면 일어나서 훈련을 받으러 방을 뛰쳐나가야만 했다. 물론 샤워도 철저히 금지됐다.
적응교육의 마지막 날 동기들끼리 모두 어깨동무를 한 채 ‘동기가’를 부르는 것으로 적응교육은 끝이 났고, 우리 모두 해사대학 동기라는 끈끈한 연대의식이 생겼다고 믿었다. 적어도 그 날 만은 그랬다.
나만의 착각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에게 해사대학 여학생은 ‘동기’도 아닌, 그렇다고 ‘여자’도 아닌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존재일 뿐이었다.
‘동기가’에는 “한 가치 담배도 나눠 피우고~”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학생들과 담배를 나눠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혼자서 조용히 담배를 태우기라도 하는 날엔 린치를 당하거나 온갖 추잡한 단어와 함께 생매장을 당했다. “여학생 구역에서 담배꽁초가 나왔다더라.” “어제 2층 복도 끝에서 쫜쫜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봤다.” 하루 종일 이런 얘기로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도 모자라 이름을 캐묻기 바쁘다.
학생회 조직에서도 여학생들이 맡을 수 있는 직책은 한정되어 있다. 사관장, 정책부장, 기획부장 등의 주요 직책은 남학생이 맡고, 상대적으로 남학생이 하기 꺼려하는 여학생 부장, 여복지사관 등의 직책들이 여학생 몫으로 남겨진다.
진정한 동기로 거듭나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하고, 남학생들과 똑같이 훈련 받고, 노력해도 여학생들은 그들만의 리그에 낄 수 없다. 오로지 그들이 허락해 준 여학생들만의 리그에서 서로 경쟁하고, 밟고 일어서며 그들과 같아지기 위해,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입학 후 ‘동기’와 ‘여자’ 사이에서 끝없는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여학생들은 점점 혼란스러워 하며, 이런 상황을 피곤해 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정확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 무력해진다.
이런 문화가 밑바탕이 된 조직에서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여남에게 동등하게 주어질 리는 만무하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해운회사 중에서 해기사로 여학생을 채용하는 회사는 고작 3곳이 있는데, 이 역시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다. ‘남학생 50명 채용, 여학생 2명 채용’ 이런 식으로 구분해서 채용하기 때문에 여학생들끼리의 경쟁은 더욱 심화되고, 채용의 기회를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채용된다 하더라도 여성 해기사로 해상에서 근무하기란 녹록치 않다.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성희롱에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며, 재수 없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에는 ‘여아일언중천금’의 정신으로 입을 틀어막아 상대방의 위신과 자신의 평판을 사수해야만 한다. 더 재수 없이(?) 임신이라도 했을 경우에는 살포시 고개를 떨군 채 신속히 배에서 내려 주셔야 한다. 내 자신(여성)이 배 안에 존재 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불편해하는 그들만의 여러 가지 사정을 항상 들어주고, 배려해야 하며 남자 동기들에 비해 승진이 늦더라도 그런 것쯤은 대장부(?)처럼 “허허허” 웃고 넘길 줄 아는 아량을 보여야 한다. 각국의 항구에 입항 할 때마다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성매매를 보고도 못 본 척, 그들의 음담패설을 듣고도 못 들은 척, 따지고 싶어도 말을 못 하는 척, 삼중고의 고통을 내면화해야 하는 것도 필수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까? 남자들도 이런 고민들을 하며 힘들어할까?
난 이제 떠난다. 다시 바다로. 앞선 의문들과 내가 있어야하는 공간에서의 수많은 부당함과 마주했을 때 어찌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안은 채. 행복해지기 위해서 민우회의 문을 두드렸듯이, 그 안에서 연대하고 서로 지지해주는 과정을 겪으며 행복해졌듯이. 이제 타인의 눈치를 보고 맞춰가기 위해 노력하며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단단하고 꽤 괜찮은(?!)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기에 난 두렵지 않다.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민우회 언니들이 있으니깐. 그리고 평생 함께 갈 나의 동반자, 페미니즘이 있으니깐.
월경(越境) ● 경계를 넘어서다. 요로코롬 살고 싶어서요.
* 상선이라 함은 국가 간 무역을 할 때 대량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상업용 선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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