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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4월호 [기 획 거짓말] 거짓말의 사회학 혹은 철학
[기 획 거짓말] 거짓말의 사회학 혹은 철학
박민영 ●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진술의 참됨은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을 말함으로써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커다란 해를 입는다 해도 그 의무는 지켜야 한다.”
한 마디로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 순진해 빠진 얘기다. 왜냐하면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기 힘든 거짓말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도가 “집에 예물 있지?”하고 물었을 때 “없다”고 거짓말한 사람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혹은 망명 신청자를 뒤쫓던 극우파가 다가와 망명 신청자가 어디로 갔는지를 묻는다면? 프랑스 철학자 뱅자맹 콩스탕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진실을 말할 권리가 없다.” 이런 거짓말들은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개인과 사회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거짓말하지 말라고만 교육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날 때는 반대로 교육받는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화상 환자를 보고 “징그럽다”고 하거나 할아버지에게 “냄새 난다”고 한다면, 양식 있는 부모는 아이에게 그렇게 느끼더라도 사실대로 말해선 안 된다고 가르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고, 나아가 인간 차별적 인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 속 작은 거짓말 그리고 권력과 만난 거짓말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거짓말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약속시간에 늦고서 “길이 막혔다”라고 하거나, 원수 같은 직장 상사에게 미소 지으며 “좋은 아침입니다!”하고 인사한다. 또한 “아직도 나 사랑해?”하고 묻는 아내에게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럼!”이라고 답하거나 상대방이 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뭐, 이런 걸 다, 정말 고맙습니다!”하며 기뻐한다. 이런 거짓말들은 특별한 악의는 없으면서도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거나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든다. 사회생활은 이런 작은 거짓말들을 일상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거짓말이 권력과 만나면 큰 재앙을 낳을 수 있다. 일례로 대기업과 대자본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운운하지만, 그것은 공공연한 거짓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장 권력을 이용해 얼마든지 수요를 창출할 수 있으며, 가격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당한 이득 수취를 은폐하기 위해 ‘시장 기율’의 신화를 이용할 뿐이다.
통치자의 거짓말
그리고 거짓말이 진실이 되는 과정
정치에서 거짓말은 더 흔하다. 정치이론에서도 통치자의 거짓말은 필수 요건처럼 여겨진다. 플라톤은 거짓과 속임수를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주권자의 특권이라고 했다. 그러나 통치자 외에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국가를 해치고 위태롭게 하는 것이므로 처벌해야 한다. 또한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권력을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이타주의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유능한 정치인의 요건은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스스로 믿는 것이다. 거짓말이 신념화해야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확신에 찬 어조로 남을 설득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정치인이 ‘자기기인(自欺欺人,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인다)’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성적인 동물인 인간이 가진 딜레마의 극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을 동원해 세계를 탐구할 수도 있고 남의 의식을 조종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인간은 스스로를 속일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반복되면? ‘속인 자신’이 ‘자신’이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 내부에서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붕괴된다.
자기 내부에서 거짓말이 진실이 되는 과정은 이렇다. 인간이 정상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아상(self-image)이 반영된 신념”이 필요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의식되면 자아상과 신념간의 부조화가 발생한다. 부조화가 발생하면 인간은 불안해진다. 불안해지면 불안을 줄이고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부조화 줄이기’라는 자동조절장치가 작동한다.
이 장치가 ‘자기 정당화’이다. 자기 개념(self-concept)과 자기 가치(self-worth)를 보존하려는 본능에서 자기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녀사냥 그리고 거짓말
사회적인 압력이 거짓말을 부추기기도 한다. 병적인 상태에 빠진 사회, 공포에 빠진 사회에서 개인은 자기 의지에 반해 거짓말하곤 한다. 15세기 말에서 18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발생한 마녀사냥에서 그랬다. 당시는 중세의 세계관이 붕괴되고 원시 자본주의가 도래하던 시대였다. 가치관의 혼란, 인구 급증, 물가 상승, 흑사병, 계층 분화, 공동체 해체, 내전과 반란, 흉년과 기아로 사회적 불안과 긴장이 극에 달해있었다. 과도한 사회적 불안과 긴장은 공격 욕구를 팽창시켰고, 그것을 해소시킬 희생양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한 마녀 사냥은 대부분 연쇄고발의 결과였다. 먼저 재판을 받은 마녀가 동료 마녀의 이름을 대면, 그 동료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이들은 다시 동료의 이름을 대도록 강요받았다. 집단적 히스테리 속에서 공포에 휩싸인 여인들은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가까운 친구나 이웃을 마녀로 지목했다. 여인들은 친구나 이웃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사바트(마녀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보았다고 거짓 증언했다. 그렇게 해서 수십만 명이 마녀로 몰려 처형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거짓말에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마사태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자기를 불러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해서, ‘하야(下野)하시는 도리 밖에 없다’고 말했다. 며칠 후 과연 대통령이 하야했다.” 그가 이렇게 쓴 것은 자신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4.19는 없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린 한 나라의 대통령이다. 이승만은 그 외에도 10명 또는 30명한테 물어봤을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역사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거짓말인가, 아닌가?
굳이 말하자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이란 현재 필자가 놓여있는 위치에 따라 과거 자신이 한 언행에 대한 상황적 채색을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은 보이는 세계 뿐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에 대해 냉철하게 성찰하는 힘이 중요함을 말해준다. 그런 성찰의 힘은 깊은 인문적 사유능력에서 나온다. 인문적 사유능력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많은 책을 읽고 생각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할 수 있고, 거짓말을 하고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박민영 ●
문화평론가, 인문 저술가. 저서로 『즐거움의 가치사전』, 『이즘』, 『책 읽는 책』,
『논어는 진보다』, 『인문학, 세상을 읽다』 등이 있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인문학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란, 어떤 행위로 범죄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행하는 심리 상태를 말하는 법률용어이다. 본문에서는 자서전을 읽는 독자들이 ‘본인이 역사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오해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이승만 前대통령과의 대화를 넣은 이의 심리상태를 비유한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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