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4월호 [기 획 거짓말] 가정의 달에 앞서
[기 획 거짓말] 가정의 달에 앞서
엄마 아빠, 다 거짓말이야
꼬드래곤 ●
나는 흡연자라네
나는 담배를 피운다! 그까짓 기호식품 하나 섭취하는 것에 뭔 세기말 종말론 외치듯 문장을 불태운 이유는 그렇다. 나는 5년 동안 엄마 아빠를 속이고 있다. 소심한 사람인 나는 필연적으로 치밀하여 흡연을 숨기기위해서 대학을 다닐 때부터 집에 가기 전에는 사물함이나 친구들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숨겨놓았고, 지금 ‘엄마’집에 갈 때면 필히 사무실에 두고 간다. 혹시 가방에 잔류된 라이터를 발견하면 버스나 지하철 휴지통에 가감 없이 버린다.(무려 400원인데!) 버린 라이터만 모아도 한 달 방세는 되겠다. 집에 가기 전에는 손도 박박 씻고, 냄새 배긴 옷은 바로 갈아입는다. 주인집에서 전기배선공사나 갖가지 이유로 방에 들어올 일이 있을 때는 (엄마에게 얘기가 전해갈 수 있기 때문에)룸메이트와 담배 숨겼냐는 얘기부터 한다.
4년 동안 자취방에 엄마 아빠가 오는 일을 막았다. 물론 담배, 라이터야 숨기면 그만이지만 냄새는 남아있다. 가족끼리 고기라도 구워먹고 아빠가 ‘식후땡’으로 담배를 피워댈 때면 목구멍으로 흡입되는 그 허연 공기가 부러워 한참 쳐다보기도 한다. 그까짓 담배 하나 안 피면 그만이지, 그건 내가 제일 많이 생각한다. 왜 그놈에 담배를 피게 돼서 이렇게 많은 고생을 해야 하나 싶다가도 친척들이 모인 설날 밤에 담배 피러 유유히 나가는 또래 남자 친척을 볼 때면 그 친구와 나의 거리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실 그건 꽤 무섭고 슬픈 ‘거리’다. 누구에게는 콜라를 먹거나 커피를 마시듯 자연스러운 일이 누구에게는 이렇게 기약 없을 비밀로 치밀하게 숨겨야 하는 무엇. 그래, 나는 여자니까.
거짓의 역사
거짓말이란 주제로 글을 쓰려고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 아빠에게 한 거짓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아니, 별로 ‘진실’을 나눈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성적표를 숨기고 나중에 성적이 나올 거라는 둥, 아마 수학은 80점을 맞았을 것 같다는 둥, 수능점수까지 속였다(이건 실패했다. 기어코 성적표를 찾았으니). 내가 거짓말 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많은 욕설과 압박을 받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성적을 들킬 때는 좋아하는 TV가 사라졌다. 대학 때는 연애를 하게 되면서 애인과 여행을 가고 싶을 때나 같이 있고 싶을 때 당연히 거짓말을 했다. 엠티를 가야 한다, 친구가 아파서 약을 사가지고 가야 한다(이건 잘 안 믿었다), 새벽에 알바 때문에 나가야 한다(고 얘기하고 그 전날 다들 잠든 밤에 나간다. 동생이 잘 도와줬다) 등등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 첫 일터는 기지촌에 있는 성매매여성상담소였다. 엄마 아빠에게는 의정부에 있는 사회복지관이라고 속였다. 한참 성매매특별법이 통과될 시기에 엄마와 아빠는 뉴스를 보며 성매매여성에 대해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을 했다. 당연히 그 여성들을 상담하는 곳이(심지어 기지촌) 내 첫 직장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다. 초등교육을 시작할 때부터, 질풍노도의 시기, 나의 첫 연애, 첫 직장 등 대부분 굵직한 삶의 주제에 엄마 아빠는 빗겨나 있었다.
그저 ‘나’로 산다는 것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건대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믿는다). 내 존재가, 그냥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내가 살고 싶은 많은 것들이 거짓이 돼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을 뿐이다. 숨겨야 내가 편하니까. 숨겨야 욕먹지 않으니까.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거짓말이 반복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들킬까봐 살펴야 하는 일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제일 큰 문제는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관계 안에서 반복적으로 거짓말을 하다보면 자아는 움츠러들고 흠집나기 마련이다. 치밀하게 숨기면 그만이 아니다. 숨겨야 하는 나를 단단하게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여자들은 ‘비밀’의 의미를 알지
몇 년 전, 이유 없이 아팠던 때가 있었다.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아플 때 이곳저곳 병원을 옮겨 다니다 다다른 병원에서 의사는 엄마와 나에게 조심스럽게 정신과를 가보면 어떻겠냐고 말했었다. 충격 받은 엄마의 눈빛을 보며 처음으로 모든 걸 말하고 싶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담배도 피고, 여성운동을 하고 싶고, 내 유년시절은 많이 우울했다고. 억울함과 외로움이 뭉쳐서 일그러진 부위가 많은 것 같다고. 그렇지만 정신과를 가보라는 것부터가 충격인 엄마의 눈빛을 보고 생각을 접었다. 언젠가부터 14살인 막내 여동생에게 나는 모든 걸 말한다. 정말 모든 걸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어떤 것이든 꽁꽁 싸맨 동생의 모든 비밀과 거짓말을 나에게만은 말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면서 그 친구를 사랑할 줄 알게 됐다. 나이를 떠나 여자들은 비밀의 의미를 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떨림을 기억할 줄 안다. 엄마에게도 그러고 싶지만 아직은 이르다. 어떤 영화장면처럼 옥상에서 쪼그려 앉아 담배를 문 엄마의 비밀을 듣고 싶은 판타지도 있다. 거짓말 권하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며 누군가와 연대하기. 이토록 어렵고 서글픈 숙제다. 엉엉
꼬드래곤 ● 이사 갈 때가 되면 서울 하늘이 낯설다.
내가 서 있는 곳, 어른 되기, 부동산 언어를 이해하기, 주거는 공간이 아니라
삶이라는 말이 여기 심장에 와서 박힌다. 살기, 살기,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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