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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4월호 [새로운 페이지] 딱히 무엇이 될 필요는 없는
편집자 주 <새로운 페이지>는 선배 여성운동가 혹은 누군가에게 듣는 인생의 또 다른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신설된 꼭지입니다.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만들어 가고 있는 누군가를 알고 있다거나 이야기 듣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추천해주셔도 좋습니다.
[새로운 페이지] 딱히 무엇이 될 필요는 없는
무엇이든 다 되어보는
박진창아 ●
나는 담쟁이를 좋아한다. 담쟁이와 나는 서로 닮았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 돌담을 타고 오르는 연둣빛 담쟁이를 만났다. 제주도말로 ‘말 골암직허게 생긴’(* 똑 부러지게, 야무지게 생겼다는 뜻) 그 친구는 지난 겨우내 벽 위에 마지막 역사를 새긴 것처럼 비장미가 느껴질 정도였건만 이 봄날에 씩씩하고 명랑하게 웃으며 벽을 타 오르고 있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고양이와 나는 서로 닮았다.
시간차를 두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길고양이와 바쁘게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길고양이 두 마리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야옹~’하고 인사를 건넸지만 덩달아 웃어주기를 기대하진 않았다. 그 친구들은 원래 좀 까칠하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이 얼마나 상냥하고 자족적이며 독립적인 스타일을 가진 종족인지.
담쟁이의 기질과 고양이의 기질을 닮은 나는 현재 마흔세 살의 비혼이며, 비주류(또는 인디) 계열의 문화공연기획자이자 끔찍한 이 시대의 경제난민이다.
이 원고의 콘셉트가 ‘선배 여성운동가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라는데 어쩌다가 첫 주자가 되어 이 글을 쓰자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 누군가의 멘토가 될 깜냥도 못되지만, 결국 맨얼굴의 자신을 마주하고 드러내는 글감이 아닌가 말이다. 평생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야무진 후배(?) 여경鏡(정슬아) 때문에 쓴다.
나는 90년대, 어른들 말처럼 ‘펄펄 나는’ 20대부터 제주여민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 그리고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와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회의록과 자료집, 시위와 보도자료, 프로젝트와 사업보고서라는 활동 키워드, 그리고 노련한 페이퍼웍과 무수한 야근으로 단련되던 조직 경험을 갖고 있다. 마치 여성계의 장돌뱅이와도 같이 두루두루 겪었다. 그리고 시절의 고민, 시절의 소명에 딱! 내 그릇만큼 참여하며 살았다.
여성주의 문화기획에 대한 열정으로 페미니스트 가수 콘서트를 열고, 안티미스코리아페스티벌, 대한민국여성축제, 빅우먼 패션쇼, 수다공방 패션쇼, 콘서트 여악여락, 여성장애인 문화나눔 축제, 티베트평화콘서트 등을 기획, 연출하며 문화공연기획자로 버전을 업데이트하였다. 이렇게 쓰고 보니 한 인간의 자서전이 책 한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다. 20여년의 삶이 이렇게 몇 줄로 정리되는 것을^^;;
2009년, 도시빈민으로 살다가 10여년 만에 제주도로 귀향했다. 금의환향이 아니라 엠비정부가 들어서고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이 끊어지면서 그 연쇄반응으로 졸지에 경제난민으로 귀향한 것이다. 그러면서 제주 자연의 품에 들었다. 산길 바닷길을 따라 걷고, 음악과 책을 읽으며 간혹 내면의 어떤 골목과도 마주하며 널널하게 보냈다. 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리며 담쟁이처럼 천천히 벽을 타 오르면서 말이다.
그렇게 놀다가 지리산학교를 벤치마킹한 한라산학교(cafe.daum.net/hallasan-school)를 기획하여 지역의 문화예술인과 장인이 그들의 재능과 기술을 나누는 문화교류의 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제주지역의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며 달리도서관(cafe.daum.net/dallibook) 기초 콘셉트를 기획하고 뜻이 맞는 벗들과 일을 저질렀다. 통 큰 여자가 공간을 제공하였기에 추진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달리도서관은 구성원들이 비혼과 기혼의 조합을 이루며 자체적으로 북카페와 게스트하우스 운영, 회원 회비로 자립적 생존을 시도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삶의 지향이 닮은 이들끼리 문화 공동체를 꾸리고 사회적 기업을 모색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내 삶의 지도를 이렇게 뒤돌아보자니 재차 웃음이 나온다. 물론 허탈한 웃음은 아니다. 자신이 걸어온 삶의 지도를 찬찬히 바라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유의미한 작업이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고민으로부터, 뭔가 되어보고자 스스로 단근질하던 때로부터, 그리고 내 삶의 많은 두려움과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던 시절들을 지나왔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비중이 컸던 고민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가난을 받아 안아야 하는 삶에 대한 것이었다. 마흔을 넘긴 지금, 그것은 고민거리가 아니다. 그냥 내 삶이다.
나는 내 삶이 어떤 운명적 기운에 의해 나아가고 있음을 그냥 받아들인다. 단순하게 살기! 모드로 내 천복을 믿고 나아가는 여행자로 나를 또 업데이트하고 있다.
책을 읽다가 발견한 좋은 문장들이 삶의 비타민이 되어줄 때가 많은데 두고두고 오래 남는 좋은 문장하나 소개하며 글을 끝낸다.
박진창아 ● 아~ 이 글을 읽는 이가 제주도에 오게 될 때는 달리도서관에서 머물며
착한문화공간을 후원해주길 바라는 사심도 살짝 첨가한다
* 하지만, ‘고양이털 알레르기’라는 천벌을 받아 함께 살던 깜딱이를 입양 시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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