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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6월호 [마포나루에서] 모두 쉬고 있습니까
[마포나루에서] 모두 쉬고 있습니까
이선미(썬)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일상, 익숙해진다는 것
오전 11시 30분 땡! 나름의 점심을 준비하는 배고픈 영혼의 외침. “밥상도시락 하나요.” 이런지도 벌써 1년, 이번 달로 꼭 12개월째다. 새삼 ‘시간 참 빠르다’는 흔해빠진 말이 가슴에 콕 와 박힌다. 정신없이 지나가버린 시간들로 더 정신 못 차리겠는 지금, 일상에 익숙해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인다. 물론 일상이 단순히 익숙해진다는 것만으로 표현 할 수 없음을 안다. 계획된 것과 계획하고 싶지도 않았던 새로운 사건들이 대기표를 뽑고 함께 줄지어 있기에, 그에 따른 스펙터클한 이야기도 아주 많이 숨어 있을게다. 그러나 때때로 낯설음이 주는 자극으로 코에 바람을 쐬어 주고 싶은 그런 순간이 온다. 지금의 여기가 아닌 낯선 저기로 떠나는 것! 강렬한 콧김을 내뿜으며 한 숨 크게 돌리고픈 마음을 달래 줄 ‘쉼’이 필요한 순간 말이다. 작년 말, 여기 민우회 활동가들의 이런 순간들을 조금이나마 채워 줄 ‘저기’가 대기표를 뽑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2박3일간의 제주 ‘쉼 프로젝트’이다.
이웃과 친구 되는 법
동행(同行),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간세다리 원정대는 생각만으로 긴장되게 만드는 31명의 동행인이 있었다. 괜스레 겁부터 나는 규모인거다. 어색해서 긴장 될 것 같고 이동은 어쩌나 밥은 어떡하나 잠자리는… 등등 여러 고민이 뒤따르는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겁은 집어 먹었을지언정 ‘이웃 단체 친구 만들기’라는 콘셉트로 진행한 다소 머쓱하지만 아름다운 취지도 쉼과 함께 있었더랬다. 이웃과 친구 되는 것이 어디 쉽겠느냐 만은 ‘서로를 알 수 있는 그런 기회니까.’ 라며 함께 답사에 다녀와 코스를 소개하는 웹자보와 단체의 모든 활동가를 소개하는 동영상도 만들어 공유했다. 얼굴도 익히고 서로에 대해서도 알아 가자는 것이었다. 또 간세다리 나들이가 있었으니, 동태찌개에 막걸리를 걸치며 서로를 소개하는 자리도 있었다. 동행을 위해 소소하지만 준비가 필요했던 이웃, 이젠 친구가 된 혹은 되자던 그 이웃과 만나 제주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날이 있겠지.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설레는 마음 다잡고 서서히 제주를 준비하는 나름의 즐거움들이 있었으니, A는 배낭을 빌리고, B는 새 운동화를 사고, C는 엄마의 등산복을 빌리고, D는 제주 관련 블로그를 유랑했다. 언제 오나 싶던 4월이 오고 드디어 그 전 날인 4월 21일이 됐을 때, 어두운 얼굴 쫙 펴며 아싸!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뒤 꼭지가 무거워 내일의 제주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쌓여있는 더 쌓일 일들을 보며, 너무 빨리 그 날이 왔다는 막돼먹은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아침이 되니 내내 무거울 것 같던 마음은 새털같이 가볍고 발걸음은 경쾌했으며 일이 뭐지 싶을 정도로 생각도 나지 않아 별스럽던 전 날의 불안감이 무색해졌다. 알고 보면 눈 딱 감지 않고도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다는.
만나서 반가웠던 제주 그리고 사람
아침부터 집 나온 활동가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서 보았던 아담하고 아름다운 정원, 파도 아래 숨겨진 보물 보말들, 돌담 사이 바람으로 물결치는 가파도의 청보리들, 신선하고 맛나고 배부르기까지 한 회, 한산하고 조용했던 제주의 거리, 곳곳에서 발견 된 대문짝만한 장금이 얼굴, 청크린을 닮은 에메랄드빛 바다, 목을 쭉 빼고 게임하던 활동가들, 코 속을 가득 채우던 이름도 낯선 베니마돈나의 꽃향기, 드라마 속 익숙한 그곳 쫛쫛호텔과 화장실, 제주도 쫛쫛피자와 샐러드, 멀리 보이던 한라산, 집집마다 걸려있던 색색의 물질도구, 바다내음 가득 풍기던 밥상위의 찬거리들, 2박 3일간의 제주에서만 흔하디흔했던 천혜향과 한라봉, 춤추며 내리는 선착장의 승객들, 풀 뜯는 소와 말, 돌아오던 길의 서울 야경…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더 많을지 어슴푸레 짐작해 본다. 그래서 아쉽다.
여기에서
제주를 떠나며 그 곳에서의 기억도 점점 흐려진 것 같다. 또렷한 것이 없다. 일상으로 돌아 온지 2주가 지났고, 겨우 그만큼인데 꿈처럼 기억이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나 빨리 지난 일이 될 줄이야.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다. 너무 쉽게 흩어졌지만 그래도 다시 또 다른 ‘저기’가 되어 줄 ‘쉼’을 기다린다. 일상으로 돌아 온 지금, 모두 잘 쉬고 있습니까.
썬 ● 지금 이대로가 좋… 좋… 좋아요:D
* 민우+성폭 ‘간세다리* 원정대’란?
이웃 단체인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31명이 앞으로의 긴 호흡을 위해 잠시 휴식을 갖고 재충전하는 ‘쉼’프로젝트를 말한다. 2박 3일간(4/22~24)의 제주 올레 느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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