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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6월호 [기 획_몰입]그렇게 몰입하지 않아도 좋아
[기 획_몰입]그렇게 몰입하지 않아도 좋아
재윤 ●
초등학교 때부터 ‘주의 산만함’이란 단순명쾌한 생활기록부 평가를 여러 차례 받았을 뿐 아니라, 뜨거워지는 날씨 덕에 업무 몰입도조차 현저하게 낮아지는 나로서는 몰입이란 주제에 참 몰입하기 어렵다. 특히 요즘들어 어느 영화 주인공처럼 ‘오늘만 대충 수습하자’는 신조로 살고 있는 내게 몰입이란 단어는, ‘모든 일에 (닥치고) 열심히 몰입해야 뭔가 이룰 수 있다’는 식의, 대통령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설파할법한 두루뭉술한 몰입의 도덕률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다보니 딱히 몰입할 일도 별로 생기질 않는 것 같다. 별다른 목표나 꿈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몰입의 감흥과 강도가 약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역설적으로 몰입이 필요한 일이 지나치게 많아져서일 수도 있다.
일생일대를 걸고 있는 모종의 프로젝트가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다 그렇게 비슷하다(고 믿고 싶다). 차라리 몰입의 대상과 강도는 단편적이고 단기적이며 다양해진다. 한마디로, 고장난 형광등 마냥 깜박깜박 몰입하게 된다. 예컨대 처음엔 가열찬 의욕과 비전을 가지고 일에 몰입했는데 일이년 지나다 보니 그냥 매달 돈을 받는게 좀 미안해서 몰입하는 척 하는 나를 발견하거나, 하는 척 하다 보니 보람을 느끼는 구석도 생겨서 다시 몰입하거나, 이건 내가 하면 잘하겠다 싶어서 시키지 않아도 몰입하거나, 아예 목적을 잊고 그 자체에 몰입하거나, 아니면 지난 몇 년간 많은 사람이 그래왔듯 어처구니 없거나 분노를 일으키는 이슈에 그때그때 몰입하거나 등등.
가만 생각해보면 사소하지만 순수하게, 예술적 쾌락과 열반에 근접하는 몰입의 기억도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학교 다닐 때 사물놀이를 한 적이 있는데, 연주나 공연을 하면 아무 자의식 없이 무아지경에 빠지곤 했다. ‘나를 잊고 리듬에 몸을 맡긴다’는 식의 표현이 그냥 수사가 아니라는건 경험한 사람만이 안다. 수험생이라는 이유로 눈치 보며 음악을 들어야 했을 때의 몰입도는 말초적인 탐닉에 가까웠다. 음악은 가끔 순도 100%의 마약같은 효능을 가질 때가 있는데, 좋아하는 곡들의 핵심만 암기과목 요약 훑듯 듣는 순간들 역시 자아는 사라지고 몸은 구름위로 떠오른다. 마약이 소재인 어느 영화의 표현처럼 ‘오르가즘을 백배로 뻥튀기 한 듯한 느낌’이란 분명 내가 느꼈던 그 순간들과 같은 느낌이리라.
그렇게, 내가 창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직업적이고 지속적인 몰입은 아니라 해도 절대적으로 몰입의 순간들이 ‘권장’되는 대표적인 영역은 숭고미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예술이나 학문같은 영역이다. 경우에 따라서 자기파괴적으로 대상에 몰입한 생산자 개인은 불행할지 몰라도 수용자나 수혜자들은 심미적 지적 쾌락과 행복을 느끼며 함께 몰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고 나눈다는 점에서 긍정의 집합적 정서를 가지는 몰입의 영역들이기도 하다. 이와는 다르지만 사회적 가치의 위계를 벗어나 별 효용이나 의미가 없어 보이는 대상에까지 에너지를 쏟고 모종의 경지에 이르는 오타쿠의 몰입도 특별한 가치관이나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감성으로 집중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반대로 몰입의 순간들이 변태적인 집착과 재앙으로 쉽게 변질되는 거의 유일한 영역은 정치공간이다. 실상 예술-학문-정치는 개념적으로만 분리되는 범주니 현실정치라고 말하는게 더 정확하지만, 어쨌든 우리 정치의 현장에서, 우리가 매일같이 동향을 보고 듣는, 웬만한 사람은 명함도 못내밀만큼 업무 몰입도가 높은 최고위 공무원인 그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호불호와 정치적 성향을 떠나, 나쁜 몰입의 영역-나쁜 몰입의 방식-나쁜 몰입의 결과라는 세 가지를 버무린 ‘몰입의 나쁜 예’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로 손색이 없다. 물론 그분의 정치적 동료들이나, 그분에게 반하는 입장에 있으나 같은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도 종종 그분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이념이든 정책이든 애초에 별 성찰성이 없는 단순한 프레임 안에서 뭔가에 죽어라 몰입하면 병적 자폐의 수준까지 간다는 점에서 그분만큼 독보적인 사례를 본 적은 없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철지나거나 촌스럽거나 시대에 안맞는 프레임 안에서, 정치적 입장을 배제하더라도 성찰성 자체가 거의 없는 프레임 안에서 시작하는 몰입, 그리고 그 프레임의 외부를 전혀 사고할 언어를 갖지 못하고 소통하는 방법도 모른 채 하는 몰입은 현실정치 영역에선 쥐약처럼 위험하다. 더구나 그분이 아주 순수한 대의와 진정성을 가지고 모든 일에 몰입하신다는건 굳이 검증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더 위협적이다. 이런 상황에선 외부의 자극에 반응해 성찰을 해봤자 지극히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 하게 된다. 그분이 가끔 나름대로 하는 자기반성적인 수사나 내용이 딴다리 긁기로 느껴지거나 개그로 보이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분이 하는 종류의 몰입이 ‘나쁘다’는 가치판단은 다른데 있지 않다. 바람직한 몰입의 순간이란 몰입하는 대상 자체와 그 외부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사고와 언어와 감수성을 가졌을 때라는걸 그분의 사례를 통해 깨닫고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정치나 행정 따위와 관련한 영역에 아무리 몰입질을 해봤자 예술적인 숭고의 경지로 승화되는 일이 생길 리도 없고, 구경하거나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심미안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러니 그분처럼 정치를 순수예술처럼 생각하고 기똥찬 결과를 보여주겠노라 나 홀로 귀막고 눈감고 몰입하는 순간 몰입은 악몽이 된다. 적어도 그분이 활동하는 무대에서는, 남의 얘기가 들리지 않거나 들려봤자 전제부터 엉뚱하게 해석되는 몰입이라면 생산성 없는 중증 자폐증일 뿐이다.
지지부진 두서없이 주절대다 그분 얘기가 나오니 무서운 몰입도를 발휘해 원고 세 문단을 순식간에 채울 수 있게 됐다.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든 놀라운 몰입의 힘이란. 각설하고, 사실 모든 종류의 몰입은 성찰과 함께 간다. 아니 가야 한다. 몰입과 함께, 또는 몰입을 통해 스스로의 심연을 발견하고 되짚는다는 의미의 성찰이든, 인지적이든 도덕적이든 심미적인 성찰이든 간에. 앞서의 그분에게 부탁드리는 어조로 표현하자면, ‘늘 그렇게 미친듯이 몰입하지 않아도 좋아요. 대신 좀 돌아봐 주세요’ 로 표현된다.
어느 순간 내 몸의 모든 신경과 세포들이 반짝대며 응집하고, 반응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몰입의 순간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이를 각성과 환기와 성찰과정과 함께 얽어가며 몰입의 순간들을 끊어내거나 완급을 조절하는 것. 앞머리에 형광등이 어쩌고 했던 표현을 사용하자면 ‘깜박깜박 형광등 몰입론’이랄까. 그러니까 이건 관계에 몰입하는 동시에 이리저리 성찰도 해줘야 파토나지 않는다는 조언을 건네는 빤한 연애론과도 비슷하다. 알다시피, 이런건 늘 말이 쉽다. 누가 몰라서 못하나. 말하자면 나는 아직 그런 종류의 몰입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이왕 하려면 뭐가 됐든 그렇게 해보자는 다짐이다. 한편으로, ‘몰입의 나쁜 예’를 위해 길게 예를 든 그분만큼의 열정은 있으나 닮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을 위한 제안이기도 하다.
재윤 ● 원고에는 언제쯤 몰입할 수 있을까요.
빈곤한 인문학적 소양에 대한 몰입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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