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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6월호 [기 획_몰입] 몰입의 좋은 예
[기 획_몰입] 몰입의 좋은 예
뭉치 ●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다. 그는 절망했다. 그는 천장 너머 허공을 보고 있다. 허공에서 푸른 물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남자는 푸른 물을 향해 손을 뻗는다. 바다다. 바다가 천장에서부터 천천히 차올라 남자를 삼킨다. 환각이었다. 그 환각이 남자를 절망에서 깨웠다. 남자는 바다로 달려간다. 잠수 기계를 붙잡은 그를 그의 애인이 붙잡는다. 애인은 그가 자신과 함께 세상에 뿌리 내리고 살기를 바랐다. 뒤 돌아보지 않는 남자의 등이 말한다. 저기에 내가 있어. 남자는 사로잡혀 있다. 여자도 알고 있다. 그가 사로잡혀 있는 바다가 바로 그의 빛이라는 것을. 여자가 남자의 손을 놓아 준다. 잠수 기계의 푸른 빛이 조용히 바다 속으로 잠긴다. 수심의 한 가운데에서 남자는 가만히 주위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검고 고요한 바다뿐이다. 어디선가 허밍이 들려온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돌고래가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다. 남자가 손을 뻗어 보지만 닿지 않는다. 남자는 망설인다. 뒤를 돌아 잠수 기계를 바라본다. 돌고래는 남자를 부르고 있다. 잠수 기계를 붙잡은 채로는 돌고래에게 닿을 수 없다. 남자는 다시 잠수 기계를 돌아보고, 지상으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끈을 놓고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해변에 사는 사람들 중 일부만이 심해에 들어간다. 그들은 남들이 쫓지 않아도 쫓을 수 밖에 없는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한 사람이다. <그랑 블루>의 마지막 장면은 자기 세계에 몰입한 인간만이 닿을 수 있는 깊이를 보여준다. 심해는 아름답다. 그런데 왜 아름다울까?
<카드로 만든 집>의 샐리는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 후 자폐증상을 보인다. 샐리는 아빠가 달나라에 있다고 믿고 그곳에 닿기 위해 카드를 쌓아 집을 만든다. 샐리의 카드 집은 아름답다. 보기 좋기 때문은 아니다. 그 집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빠에 대한 깊은 상실감과 그리움, 해변의 평온한 일상으로 가려 둔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집에 어울리는 이름이 바로 <예술>이다.
애니어그램에 따르면 4번 유형은 자신의 내면 세계에 몰입하는 예술가 기질을 가지고 있다. 애니어그램은 이렇게 설명한다. “4번 유형은 심해로 내려간 다음 다시 표면 위로 올라와 자신이 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준다.”1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무언가가 벅차 숨이 막힐 때, 노래를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때, 어떤 그림 앞에서 움직일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소설이, 그 노래가, 그 그림이 자신의 비밀을 건드린다고 느낀다. 작가가 심해에서 건져올린 삶의 비밀이 우리 각자의 심해를 만지는 것이다. 심해로 들어가는 작가의 힘이 바로 몰입이다. 예술은 보이는 세계가 다가 아니며 현상 이면에 숨은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예술가는 몰입을 통해 관습에 가려진 것들을 드러낸다. 감추었기 때문에 슬펐던 것들이 드러나 치유된다.
몰입은 외부 세계를 차단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관습으로부터 안전한 세계이다. 관습이 침투하지 못한 세계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몰입의 결과물은 창조적이다.
1859년 창조론이라는 관습이 지배하는 세계에 진화론을 처음 제안한 낸 찰스 다윈의 힘도 몰입이었다. 다윈은 어린 시절부터 자폐적인 기질을 보였다고 한다. 어린 다윈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식물이나 새알, 광물 등을 수집하고 관찰하는 데 몰두했다.2 어른이 된 다윈은 갈라파고스 제도에 갔고 함께 간 많은 사람들 중 다윈만이 섬 마다 다른 새 부리 모양을 주목했다. 새 부리의 모양에 대한 다윈의 몰입은 ‘종의 기원’의 기초가 되었다.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서 몰입은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어떨까? 몰입은 자폐적인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다양한 힘의 관계들 속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 정치 영역에서 몰입은 나쁜 예를 낳기 쉽다. 그러나 정치 영역에도 몰입의 좋은 예는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게 될 때, 그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관습적인 세계로부터 거절당한 경험일 때, 그는 자신의 세계에 몰입함으로서 관습 밖의 세계를 지켜나갈 수 있다. 세상이 거절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그들은 존재만으로 세상이 어떤 것을 거부하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들이 자기 세계에 몰입할 때, 관습에 눌려 있던 낯선 고백들을 심해에서 건져 올릴 때. 그것은 소수자 정치가 된다.
뭉치 ● 그래서 저는 몰입이 즐거워요.
1. Don Richard Riso and Russ Hudson, 『애니어그램의 지혜』, 2000, 한문화.
2. Michael Fitzgerald <In Autism and Creativity> 2004.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과 창조성의 연관성에 대한 책으로 이 책에 따르면 소크라테스, 앤디 워홀, 예이츠, 뉴턴, 아인슈타인, 루이스 캐럴 역시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집단에 적응하지 못해 사회적 관계 형성이 어렵고 복잡한 주제에 집착하는 현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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