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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8월호 [마포나루에서]마포 나루 ‘밖’ 유럽에서, 과잉충전 휴가 보고서
[마포나루에서]
마포 나루 ‘밖’ 유럽에서, 과잉충전 휴가 보고서
최김하나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2년 넘게 반성폭력 운동에 매진했더니(ㅋ) 쌓인 내공만큼 에너지 방전도 슈슉… ‘훈늉한’ 민우회는 상근활동 3년차가 되면 무려 한 달의 ‘충전’ 휴가를 쓸 수 있다! 신입 때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두었던 유럽행 티켓을 확 지르고 고심 끝에 정한 목적지는 독일, 프랑스, 스위스 그리고 착한 가격의 러시아 항공 덕에 들르게 된 모스크바까지. 4월말 즈음 민우회 애인들과 함께 했던 제주 올레의 여운을 미처 즐기지도 못한 채, 김제동 콘서트 준비로 막 분주해지기 시작한 사무실로부터 과감히 탈출을 감행했다. 그렇게 5월 한 달을 민우회가 아닌, 서울도 한국도 아닌 곳에서 보냈던 자랑 반 투정 반 이야기 살짝쿵.
#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더라
러시아에 대한 사전 정보는 극우인종주의자들이 한국 유학생을 공격했다는 보도, 러시아 사람들은 다 불친절했다는 인터넷 여행기, 재수 없이 경찰 시비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는 여행책자의 조언까지 죄다 겁나는 것들뿐. 그 바람에 도착한 첫 날, 숙소를 못 찾아서 비오는 밤거리를 헤매는 동안 어찌나 긴장을 심하게 했던지 윗배가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말도 잘 안 통하고, 어딜 가든 낯선 ‘동양여자여행자’에게 쏟아지는 시선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지하철역에서 두리번거리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손짓 발짓으로 길을 알려주는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고, 거리 곳곳에서 열렬히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을 보면서 (시크한 언니 커플도 있었다! ^-^)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구나’ 싶었다. 그렇게 모스크바가 점점 편안해졌다. 거리도 건물도 뭐든지 크고 거대한 시내에 익숙해지고, 러시아 글자 ‘p’는 r발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니 떠나야할 날이 되더라. 비록 기대해마지않던 모스크바에서의 메이데이를 허탕 치는 바람에 두고두고 후회할 거리가 생겼지만 그래서 다음 번엔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꼭 다시 와야겠단 다짐이 남았다.
# 나는야 어쩔 수 없는 민우회 ‘빠순이’인가봐
전체 일정의 1/3을 차지한 독일에서는 전역을 대부분 돌아보다시피 하면서 참 여러 순간 ‘나는 과연 서유럽 빠순이가 아닌가’ 자문 할 정도로 모든 것이 다 좋았다. 다만 딱 한 가지, 유래 없이 심하게 추웠던 날씨를 제외하고. 가뜩이나 저예산 배낭여행객에게 유로 물가는 턱없이 높았던지라 배고픔에다가 입김 나오는 추위까지 더해지니 서러움과 외로움이 극에 달했다(ㅠㅠ). 그러자니 어딜 가나 집 생각, 민우회 생각이 떠나질 않는 거다. 몇 백 년 된 성당, 휘황찬란한 궁전, 온갖 것들이 전시된 박물관엘 가도 그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지 않은 나를 보면서 ‘어떻게 떠나온 여행인데 이러고 있나’ 하는 마음에 불안함과 조급함이 밀려왔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한인민박에 묵게 되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한국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몸과 마음에 큰 위안이 됐더랬다. 그러나 일장일단이라 하였던가, 인터넷 정보검색을 통해 파리 관광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교환하는 다른 한국인 여행자들을 만나면서 줏대 없이 과도한 관광스케줄을 소화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버렸던 것. 며칠 사이에 각종 미술관, 교회, 궁전, 탑, 다리 할 것 없이 마구 헤치우다 보니 어느덧 일정이 절반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니스-칸-모나코로 이어지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으로 이동해서야 비로소 휴식, 쉼 같은 단어가 머릿속에 살포시 내려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추위 탓에 거의 매일을 입어야했던 두꺼운 티를 그제야 벗으면서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재밌는 건 좋은 곳에선 또 좋은 대로 집 생각, 민우회 생각이 나더란 말씀! ^^;; 그러고 보면 휴가철이 아닌 시기에 학생도 아닌 내가 어찌 한 달 배낭여행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별 수 없이 정체를 드러내며 상담하라고, 놀러오라고 건낸 민우회 명함이 몇 장이었던가. (심지어 회원가입서도 쥐어줬다… 음, 수거는 아직;) 나 홀로 해외출장 모드로 국위선양이 아닌 (민우)회위선양(?)한 나는 그야말로 민우회 빠순이가 아닐까 잠시 생각. 히히^-^
# ‘나름 대한민국 1%’를 만끽하고 사십시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대미를 장식해준 스위스의 인터라켄. 알프스의 절경과 청아한 호수에 둘러싸인 요 산동네(?!)에서 유람선상의 여유도 만끽하고, 해발 3000m가 넘는다는 융프라우에도 오르고, 팔자에 없는 패러글라이딩도 즐겼다. 여행 기간 중 처음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마음이 들었다. 끝물에서야 아쉬움이 생기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고 말하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 시집이나 가라는 식구들 성화를 뒤로한 채 훌쩍 여행 왔던 동갑내기 여행자가 그러더라. 돌아갈 공간, 환영해 줄 사람들이 있어서 여행지에 대한 절실함이 덜 했던 걸지도 모른다고.
확실히 혼자 하는 여행은 내가 ‘여자’라는 성별을 달고 있음을 호출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게 다시 여성단체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자극하고, 이어서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인 공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하고, 그래서 돌아가면 더 기운차고 신나게 살 수 있겠다는 기운을 주었다. 어찌나 목적에 충실한 휴가를 보내고 왔는지!
휴가를 앞두고 한 달의 공백에 대비한 잡무처리에 투덜대는 나를 보면서 친한 친구가 한 마디 하더라. “야, 20대 후반에 일 안 그만두고 한 달씩이나 유럽으로 배낭여행 갔다 오면서 사무실 환대 받는 너야말로 대한민국 1% 아니더냐!”
‘여러모로 대한민국 1%’인 민우회원님들아~ 인생 뭐 있나, 그냥 열심히 충전하고 또 열렬히 방전하고 그렇게 같이 재미지게 사십시다요. 암튼 전 배터리 꽉 채워 돌아왔습니다요
하나 ● 한달치 여행담을 한 장에 추리는 고문을 당했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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