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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8월호 [기획_여행]여행에 대한 몇 단락 말하기
[기획_여행]
여행에 대한 몇 단락 말하기
다라 ●
#. 비춤
어느 저녁, 여행 짐을 꾸린다. 처참한, 또는 설레는 마음으로. 어느 쪽이든 떠나는 이유로는 손색이 없다. 그렇게, 여행이 시작된다.
처음 와 보는 곳에서 위축된 몸은 그 곳 바람에 젖어들면서 조금씩 긴장을 펴기 시작한다.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엠피쓰리플레이어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면서 낯선 길에 몸을 맡기면, 마음은 떠나온 이유를 찬찬히 되짚어간다.
혼자 떠나온 여행의 가장 큰 미덕은 사색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바뀌는 풍경과 빛 아래, 마음에 품고 온 알 수 없는 물체는 각기 다른 면을 비추이며 그 형태를 드러낸다. 아무도 말 거는 이 없는 그 고독한 시간 동안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 돌아올 때쯤이면 무언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 발견
내가 떠나와 닿은 곳 역시, 누군가에게는 그저 일상의 배경일 것이다. 하지만 여행자의 눈을 가진 이는, 탐색하고 발견하고 느낄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은, 평범한 일상의 배경 속에서도 낯설고 즐거운 사건을 발견해 낸다. 그저 내가 늘 있던 곳과는 다르다는 그 사실 하나로 말이다. 여행은 어쩌면 그런 ‘마음’을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느 여름 여행길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들이 언제나 걸터앉아 부채질하셨을 평범한 정자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쉼터인 양 감격스럽다. 작은 슈퍼의 퉁명스런 아줌마가 파는 하드 한 개에 시원하고 달달한 행복감이 담기고, 시골 길에 떨어져 터진 홍시 하나 주워 먹는 일이 너무도 재미나서 한참을 깔깔거린다. 달려오는 우리를 보고 뒷걸음질 쳐준 버스가 두고두고 고맙고, 그 버스 의자마다 다정히 매여 있는 부채들에 마음이 따듯해진다. 눈이 뒤집힐 듯한 볼거리도,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지만, 낯선 풍경과 여행자의 마음이 맞부딪혀 조응하며 만들어내는 소소한 사건들. 거기에도 여행의 즐거움이 있다.
#. 몸
다리가 아파올 때까지 걷는다. 어깨에 매달린 짐의 무게가 묵직하다. 화장기 없는(또는 해 보았자 이미 망가진) 얼굴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약간의 데오드란트 따위로는 막아낼 수 없는 원초적인 몸 냄새가 옷을 가득 적신다.
억지로 몸을 죄지 않는 옷과 신발이 연출하는 건강한(혹은 건장한) 실루엣, 가녀린 것이 민폐는 될지언정 미덕이 되지 않는 고된 여정, 각자의 몸과 여행 동안의 살림살이를 스스로 책임지고 버텨서야 하는 자립의 요청 - 이런 것들이 불러내는 몸은 평소의 그것과는 다르다. 사무실에 앉아만 있을 때는 잊고 있던 힘 있고 씩씩한 몸이 깨어나고, 몸의 ‘보여짐’이 아닌, 몸의 ‘움직임’과 ‘느낌’으로 주의가 이동한다.
평소와 다른 운동량 때문에 끼니때 마다 아우성치는 위장에 먹이를 들이 부어 주면 금세 행복해 지고, 녹초가 된 몸을 누이는 밤, 잡생각은 어림도 없이 새까맣게 잦아드는 의식 - 단순하고 건강한 한 마리 짐승처럼, 사랑스럽다.
#. 함께함
누군가와 함께 여행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여행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인데, 함께라면 때마다 협상이 필요하기에 그러하다. 어디로 갈 것인지, 얼마나 머물 것인지, 무얼 먹을 것인지, 얼마나 쓸 것인지. 서로에 대한 배려를 기반으로 각자의 욕구를 솔직히 터놓고 협상하는 것이 정답인 듯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때로 적절치 않은 동행인은 여행을 망치는 복병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골 마을 등나무 벤치에서 버너에 끓여먹는 라면에 함께 감탄할 때, 갑자기 불어오는 힘세고 멋진 바람을 손잡고 함께 느낄 수 있을 때, 오래된 소도시 상점의 낡은 간판 글귀만으로도 함께 이야기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을 때. 그런 순간들이 주는 기쁨은 참 오래도록 서로의 마음에 남는다. 너와 내가 공유하는, 마음과 기억속의 예쁜 흔적.
#. 틈새
돌아온다. 잠시 열어두었던 문이 닫히고, 다시 일상으로. 잠깐의 떠남이 아무것도 면제해주지는 않는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다. 나는 다시 내 문제들과, 관계들과, ‘살아감’이라는 지겹고도 소중한 나의 연인과, 똑바로 마주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빛깔이 조금 변해 있다. 여행이 만든 작은 틈으로 스며드는 빛이, 일상의 색을 조금, 바꾸어버렸다. 여행의 시공간이 일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열심히 나를 조이는 생활의 태엽은, 저 벌어진 틈도 금세 죄어 닫아버릴 것이다. 여행의 아우라는 곧 사라지고, 미묘한 빛깔도 거두어 지겠지. 하지만 벽에 난 틈새가 가느다란 금을 남기듯이, 여행의 시공간이 낸 틈새도 사라지지 않은 흔적을 남긴다. 손으로 더듬으면 느낄 수 있는 예쁜 금, 여행의 기억.
다라 ●
민우회 옛날 상근자 다라. 여전히 민우회가 좋은 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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