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8월호 [기획_여행]여성에게 여행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답 없는 글
[기획_여행]
여성에게 여행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답 없는 글
신나 ●
여성에게 여행이란?
목적도, 장소도, 하는 일도 제각각. 여행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하지만 여행이란 말만 들어도 벌써 적당한 긴장과 함께 설레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 여행은 바로 이런 ‘기대’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실현가능성과 상관없이 지금 당장 가보고 싶은 곳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모르겠다거나 없다고 대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디라도 그곳은 유토피아일 테니.
제목에서 여성에게 여행이 필요한 이유라고 썼지만, 사실 여성이라서 특별히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정의에 따르자면 여행의 이유는 ‘나에게 지금 부족한 것’을 찾기 위한 것이므로, ‘여성에게 여행이 필요한 이유’는 지금 여성 자신에게 결핍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면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그럴싸한 단어들을 나열해서 내 방식으로 정리해 보자면, 여행이란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찾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동의 자유 자체가 제한적이었던 과거의 여성들에게 여행이 꿈이고 모험이었다면, 현재의 여성들에게 여행은 선택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조건은 좀 더 나아졌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여행을 하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희생하는 여행이라면? 자녀의 체험교육과 안락한 가족여행을 위해 골머리를 싸매야 하는 여행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안락한 쇼핑 천국이라며 소비를 충동하는 여행이라면, 여성을 위한 여행을 우리는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강요당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니 여행이 실전단계에 들어서면 애초 여행을 하고자 했던 이유는 자꾸만 흐릿해져 간다. 아니, 애초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음… 할머니와 엄마의 여행도 어쩌면 그랬을까.
여든, 할머니의 여행
팔순의 할머니는 이제는 눈도 귀도 어둡고 무엇보다 돈이 아깝다며 가고 싶은 데가 없다고 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젊었을 때 친구들과 어울려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데가 없으시다. 스무 살에 시집와서 1년 만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그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며 나뭇짐을 했다. 활달한 성격에 술도 좋아하고 담배도 태웠던 그녀에게 여행은 고된 삶의 활력소였을 것이다. 특히 울릉도, 홍도, 흑산도 등 섬을 둘러보는 단체관광은 그 시절 인기코스였다. 관광버스 안에서 벌어진 춤판에 그녀도 빠지지 않았을 테다. 어쩌면,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여행은 그 경치 좋다는 섬과 바다구경보다는 싼 값에 시름을 잊게 해 줄 춤과 놀이가 더 큰 목적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바쁜 현실과 똑같은 바쁜 관광이었어도 외롭고 고단한 삶에 한 병의 박카스 노릇을 했던 ‘좋은 구경’은 그 시절의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였기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를 보면서 나는 왠지 할머니를 떠올렸다.
여기저기 다 다녀봤는데 어딜 또 가겠냐는 할머니는 하루에 한 번 저녁시간이 되기 전 어스름할 무렵에 꼭 두어 시간 동네를 산책하신다. 사실 할머니의 산책은 혼자만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정확한 코스는 가족 중 누구도 알지 못한다. 정작 오십 년 넘게 살아온 동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동네에서, 매일 반복되는 산책을 하며 할머니는 무엇을 할까. 칸트는 평생 자신의 마을을 떠나지 않고 정해진 일과를 따라 산책을 하며 사색을 심화시켜 대철학자가 되었는데, 할머니는 어쩌면 인생과 자연을 돌아보며 마음의 평안을 찾아 가는 여행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쉰여덟, 엄마의 여행
예순이 다 되어가는 엄마는 젊은 시절 여행을 별로 하지 못했다. 가난한 집 육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처지에 처녀 적에는 부모님 병수발을 하느라, 그 다음에는 일을 하면서 사남매를 낳고 기르느라 몸을 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마가 제일 멀리 가 본 곳은 부산이었다. 내 기억으론 신혼여행지였던 태종대 조그만 호텔 앞에서 한복을 입고 찍었던 사진이 기록의 전부였다.
그거야 결혼을 했으니 신혼여행을 다녀온 것이었고, 직장을 그만두기 전까지 엄마는 항상 바빴다. 여행은 회사에서 정해주는 휴가에 가까운 서해안으로 다녀오는 정도였는데, 천성적으로 예민했던 데다 놀러갈 때마다 예닐곱 식구들의 잡다한 뒤치다꺼리로 오히려 피곤한 일이 더 많았던 탓에 엄마는 멀리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남들처럼 술을 마시거나 노래부르기를 즐기지 않았던 엄마는 가족동반 야유회에서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아 돌리기 시작하면 질색을 했다. 아빠는 사회자였는데 말이다. 당연히 돌아오는 길에는 운전까지 고스란히 엄마의 몫이었다. 여행은 엄마에게 ‘쉼’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을 위한 또 다른 ‘노동’이었다. 아빠의 퇴직 즈음에서야 제법 여행다운(?) 것을 하기 시작한 엄마는 성지순례를 위해 아빠와 인도나 중국에도 가고, 부부동반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여전히 여행의 많은 부분은 아빠를 챙기거나 자식들 선물을 고르는 데 할애되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여유로워진 것 같다. 그런데 웬걸, 엄마의 여행담은 대부분 고생담이었다. 우선, 엄마는 비행기를 싫어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함을 좋아하는 엄마는 인도에 갔을 때 갠지스 강 색깔을 보고 질겁을 했고, 중국에 갔을 때는 기름진 음식에 밥도 못 먹고 고생을 했다. 게다가 돌아오면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이는 빨랫감. 나는 매일 생각한다. 엄마랑 둘이서, 엄마가 가고 싶은 곳으로, 좀 그냥 쉬러 가는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고. 그게 바로 엄마에게 여행이 필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서른셋, 나도 여행이 필요해
내가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한 것은 수능시험을 치르고 나서였다. 비록 단 하루였지만 친구들과 함께 일정을 짜고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기차여행을 했던 경험은 무척 짜릿했다. 여행은 단지 신체의 이동에 따르는 낯선 지각이 아니라 자존감과 성취감을 주었고 기꺼이 다음 목표에 도전하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사실 외로움을 많이 타고 혼자서는 뭘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여행은 내게 아직까지도 크나큰 모험인 데다가, 여성 여행자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과 현실적인 위협은 거기에 한 몫을 더한다. 하지만, 앞으로 잘 해 나가기 위해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용기나 힘, 자신감 같은 것들을 찾고 싶을 때 떠오르는 것은 역시 여행이다. 최근에 다시 변화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도 그것이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 드디어 할 때가 왔나 싶었다. 순간 몸이 움츠러들고 약간 떨리는 기분에다가 심지어 벌써 외로워지기까지 했지만, 살짝 기대를 얹어본다. 여행을 다녀오면 자신을 좀 더 믿어주고 위해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가진 에너지를 나누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여행은 무엇보다 자신을 들여다보게 해 주고, 자신을 위해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좋아하시나요? 당신은 왜 여행을 떠나고 싶은지 혹은 떠나고 있는지요? 여행이 무언가 당신에게 특별한 것을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순간 절실하게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지금 이 곳에서 익숙했던 공간을 찬찬히 돌아보고 싶은 사람도, 모두 자신에게 없었던 것, 혹은 잃어버렸거나 놓치고 있는 것들을 잘 찾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신나 ●
미술과 시각문화를 공부하는 (아직까지는) 직업학생.
새롭고 신나는 삶을 위해 에너지 충전 여행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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