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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10월호 [마포나루에서] 업무 시간에 딴 생각하기
[마포나루에서] 업무 시간에 딴 생각하기
김지현(나랑) ● 민우회 여성노동팀
# 난 뭐가 되고 싶었었지?
난 원래 국문과에 가고 싶었다. 이 사실을 며칠 전에 아주 깊이 생각해 보게 됐다. 사람들에게 지나가는 얘기로 “난 원래 국문과에 가고 싶었는데, 철학과 가게 됐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한 적은 많았지만, 내가 왜 이 꿈을 기각했는지, 그건 내 삶에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같이 사는 친구가 국문학 전공이라 그녀 방 책꽂이에 꽂힌 소설책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다. 한 2주간 방에 처박혀서 박완서 소설을 일대기 순으로 읽어 내리면 참 좋겠다, 왜 <나목>에서 시작해서 <그 남자네 집>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지, 마흔의 박완서와 일흔의 박완서는 어떻게 같고도 다른지 그런 걸 파헤쳐보면 재밌겠다…. 그러다가 퍼뜩, 스물이 되기 전 내가 가졌던 꿈들이 떠올랐다. 난 뭐가 되고 싶었었지?
고등학교 때 꿈은 국문과에 가서 문학평론가 또는 연극연출가를 하는 것이었다. 중2, 고2 때 국어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거다. 고등학교 때 교지에 모 대학 국문과에 입학한 동문 선배가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되어서 당선소감과 희곡이 실린 적이 있었는데 그 수상소감을 남몰래 필사했던 기억이 난다. 고1 때 베프랑 예쁜 색지에 시를 적어 코팅해서 서로 주고 받았던 기억도 있다.
오랜 꿈은 대학 간판과 눈치작전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아니 전공 때문이라기보다, 운동권이 되면서 그 꿈은 자취를 감췄다. 막판 눈치작전에 점수 맞춰서 철학과를 쓰고 꼴통, 열혈 빨갱이, 정통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들이 모인 철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난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 꿈을 내팽개치고 운동권이 되었다. 동기들과 수업 출석이 아닌 집회 출석을 경쟁하듯이 체크하며 학기 중엔 학생회 사업과 집회, 방학엔 세미나와 집회, 참 열정적으로도 몰려다녔다.
과에 하나 있었던 소설 소모임은 했다. 허나 강직했지만, 어렸고 이분법적이었던 나는 소설이 펼쳐주는 세계와 맑스-레닌주의적 세계관을 내 안에서 공존시킬 수 없었고 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결국 노동 현장에 가기로 결심하면서 갖고 있던 소설책을 몽땅 과실에 갖다 풀었다. 난 이제 안 볼 거니까 너희들 가지라고. 아, ‘통합’이라고는 눈꼽만큼도 할 줄 몰랐던 어리석은 중생이여.
쓰다 보니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의 나는 업무 몰입도가 현저히 떨어진 상태이다.
# 내가 꿈꾸는 클라이막스
제주의 푸른 밤, 바다가 보이는 어느 카페에서 친구와 함께 미래 여행을 하면서 떠올린 내 삶의 클라이막스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성취한 순간이 아니었다. 살림을 꾸려가기 위한 육체노동과 세상을 바꾸기 위한 활동과 자기표현을 위한 예술행위와 몸 건강, 마음 건강이 조화롭게 짜여진 일상, 자연 가까이에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그런 일상이 내가 꿈꾸는 최상의 행복이었다.
자본주의는 ‘전인적 인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대안을 외치는 나의 삶도 대안적이거나 전인적이지 않다. 나는 이 사실에 깊이 절망한다.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말했던,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몰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그런 삶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 운명의 부름을 기다린다, 간절히
누구보다 스스로를 운동적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던 내가, 요즘은 세상의 속도를 쫓아가려는 운동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겹다. 어느 순간 활동가가 아닌 사무직 노동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이 사무직 노동이 움직임을 좋아하는 내 몸과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괴롭다. 활동 하다보면 당연히 따라붙는 실무는 나의 창조성과는 거리가 멀다.
딱 고만큼,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일을 하려면 동료의 과부하를 외면해야 한다. 동료가 말을 걸 때, 싸가지 없이 사무적으로 모니터를 쳐다보며 대답하는 내 속 저 깊은 곳에서의 호통- “운동 이전에 인간이 먼저 되라” 흑흑, 그래, 난 인간답게 살고 싶다.
그런데, 잠깐. ‘세상을 바꿔야 하니까, 활동도 재미있으니까’ 라는 이유로 몇 십 년 후에나 실현 가능할 것 같은 저 꿈의 장면은 사실 몇 가지만 포기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나의 일상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일까? 쥐꼬리만한 월급이라도 받아 월세를 내야 해서? 전문가가 되지 못할까봐, 운동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까봐 불안해서? 세상을 빨리 엎어버리고 싶은 욕심? 나만 즐겁게 살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 ‘일’을 안하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은 강박?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지 내면의 심연에 닿아보고자 매일 아침 모닝페이지를 쓴다. 간절함이 가 닿으면 어느 날 운명의 부름이 들리려나. 떠올려 보면 가슴 벅찬 몇 개의 장면, 그 조각들을 나침반 삼아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면 되는 걸까? 어쩌면 진짜 삶이란 그런 것일지도.
김지현(나랑) ● “생이 마구 가렵다” 벅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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