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10월호 [기 획 거울鏡; 비춰보기] 내가 나를 비추는, 거울을 보기 위한 준비들
[기 획 거울鏡; 비춰보기] 내가 나를 비추는, 거울을 보기 위한 준비들
윤냥 ●
내가 나를 보면서 내게 중요한 가치와 일상의 모순을 느끼는 것, 마주하기 싫은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 내가 얼마나 진보적인지, 여성주의적인지,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어떤 성향 또는 정치적 규준에 부합하는 인간인지, 정밀하게 스스로를 살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여성주의자임 또는 환경론자임이 직업선택이나 활동과 연결된 경우에는 ‘자, 네 갈등의 역사를 읊으며 고해성사라도 한번 해 보렴’이라고 요구했을 때 과연 어떤 얘기들을 할지…
이런 가정을 하는 건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정말 잘 모르겠고 궁금해서다. 어떤 기준들을 잣대로 스스로를 거울 앞에서 들여다 본적도 없거니와, 딱히 크게 갈등이나 모순이라 할 만한 걸 느껴본 적이 없어서다. 왜 그럴까? 뭐 일단은, 아예 뭘 모르거나 뻔뻔하면 갈등이나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정치적 진보성이 일상의 가부장성과 맞물리는 상황을 모순이라 느끼지 못했던 많은 선배들의 모습은 과거의 고루한 예고, 녹색과 삽질이 따로 노는 상황에 별 모순을 못 느끼며 대충 봉합해버리는 그분과 친구들의 모습은 최근의 암울하면서도 흔해빠진 예라 하겠다. 그런 이들은 갈등도 고민도 없는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부럽기도 하다.
난 그 정도로 행복한 날들을 보내지는 않는다. 여성주의를 기준으로 삼자면, 물론 약간의 갈등은 있으면서도, 아예 모르는 게 아니라 뭘 좀 알더라도 어설프니 오히려 갈등이 덜하다. 그러니까 발을 적당히 담그고 있으면 안전하다. 물론 ‘여성주의의 언저리에 있는 남성’(불편하고 부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할 길이 없다)이라는, 상당히 간편하고 애매한 포지션에 스스로를 고정시켰을 때 가능한 얘기다. 군사용어의 비유를 싫어한다면 미안하지만, 최전방에서 진두지휘하고 싸우는 건 언니들이니 나는 후방에서 소박하게 지원사격을 하는 걸로 만족하면 된다(그리고 그 정도만 해도 언니들은 예뻐해 준다). 이는 일상을 파고드는 여성주의의 날카로운 ‘시선’에 노출되고 옭아매이는 일을 애초에 피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게다가 딱히 여성주의자도 아니고 그렇게 될 깜냥도 없는 자라면 이런 식의 주제파악은 중요하고 민폐를 덜 끼치는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걸 아는 눈치와 처신.
이런 식으로 자꾸 위치잡기를 하는 건 자기합리화의 근거들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거다. 방어선 없이 거울부터 들이대고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건 좀 두려운 일이니까. 실상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준 이념이나 가치는 때로 부메랑처럼 날아와 족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여성주의의 이런저런 수혜를 받은 만큼, 응당 가져야 할 태도와 언어에 엇나가고 있는 점은 없을까? 그나마 체득한 것들이 일상의 어떤 순간들에서는 삐걱거리지는 않나? 여성주의라는 깊숙한 이름과 나의 일상적 폭력성과 찌질한 행태들이 공존하거나 따로 노는 게 느껴질 때의 왠지 모를 낯부끄러움, 알 만한 사람들이 응당 기대할 그럴듯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애를 쓰거나 낯간지러운 포장을 하는데 대한 피곤함. 이런 걸 어떻게 극복하지? 라는 질문들을, 자주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분기에 한번 정도는 던지며 모니터링도 해야 하고. 뭔가 어긋나는 것 같거나 지적을 받으면 또 합리화와 변명의 언어들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각자의 위치가 어떻든, 스스로를 특정한 기준에 두고 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느냐, 앞뒤가 안맞느냐 질책하는 건 좀 미련한 일이다. 아프기만 하고 명쾌한 답이 나올 리가 없다. 이를테면 내가 속한 연애관계의 행태에 내가 수혈 받은 여성주의의 가치가 매끄럽게 접목되지 않는다고 딱히 괴로워 해봤자 정확한 답이 나오던가. 또는 성별화 된 남성이기를 요구하는 상대와 화목한 연애생활을 위해서는 가끔 수컷 흉내도 좀 내주마, 여유도 부리는 일이 스스로의 가치에 위배될 만큼 불편한 족쇄일까. 가치와 개인의 성별화 된 역사와 정체감과 현실이 맞물려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디 그리 일률적이고 단순하겠나. 가치의 전제들은 단순하(고 또 중요하)지만 현실의 맥락들은 좀 더 복잡하다. 덧붙이자면, ‘우리’ 대부분의 공적언어는 사적언어와 그다지 따로 노는 경우가 없다. 그걸 억지로 분류해야 하는 부류와 직업군은 극소수다. 시험에 들어야 할 일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예컨대 ‘우리’에겐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고 자연스레 기준을 정하는 게 가능한 “공정한 사회”라는 초등생 수준의 표현이, ‘저들’에겐 뭔가 치밀한 개념과 논의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사안이 되는걸 보라. 그들처럼 생뚱맞은 개그를 하는 세상을 살고 있지 않다면 크게 고민하거나 괴로워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뭣보다, 모순을 잘 끌어안고 버티는 것도 나쁘지 않고 즐길만하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면서 불편함이나 이율배반을 느끼고 헤매는 건 결국 답 또는 균형점을 찾는 과정이고, 내공을 쌓으며 성장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여성주의자가 풀어낸 어릴 적 경험이 기억난다. 그녀는 ‘나는 왜 외모지상주의를 공공연하게 전파하는 연예프로를 넋 놓고 보며 수다를 떨고 즐거워하는 걸까, 나는 여성주의자가 될 자격이 없나봐’ 라는 “엉뚱한 갈등을 겪는 경험”을 하면서 차츰 성장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말한다. 이런 단순하고 단선적인 갈등부터 그대로 싸안고 풀어가는 게 크게는 공통의 가치지향을 가진 커뮤니티의 기본적인 룰을 유지하는 데, 작게는 성찰능력을 유지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 이게 옛날 말로 무슨 ‘강철 사회주의자’마냥, 되도 않을 기준을 정해놓고 되도 않을 ‘척’을 하면서 결국 자기합리화도 아닌 자기기만을 하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러니 진정성과 최소한의 성찰능력이 있다면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고 괴리감을 느끼는 건 덜 해도 된다. 자… 이제 뭐 이만하면 거울을 가지고 와도 좀 안전할 것 같다. 당신이 이 모든 게 결국 자기합리화를 위한 사전포석이라고 느낀다면, 당신의 잣대에 걸리는 나를 발견할 때 돌을 던지면 된다. 한 개 정도는 맞겠다.
윤냥 ●
다시 생각해보니 거울은 안보는 게 낫겠어요.
당장 덮어둬야 할 게 너무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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