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10월호 [민우ing] 나는 비밀이 있습니다
[민우ing] 나는 비밀이 있습니다
선백미록(신기루) ● 민우회 반차별 회원(청춘)팀
4명의 언니들과 함께 한 삶은 꽤 다이나믹했다. 거기에 엄마와 할머니까지 내가 자란 집은 여자가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권력의 분배는 머릿수대로가 아니었다. 그 불평등을 해체하는 힘은 관계능력이었다.
엄마는 타고난 서정성을 바탕으로 본인의 억압을 쉼 없는 말로 풀어낼 줄 알았고 할머니는 그것에 공감할 줄 알았다. 김 장사를 나가는 엄마의 뒤를 봐주는 것은 언제나 할머니였고 집안에 둔 자식의 손톱 밑 가시까지 눈여겨 돌볼 줄 아는 것도 할머니였다. 이 연대는 담장을 넘어 옆집 종아 엄마에게로 향했고 다시 마을 여자들끼리의 계, 마실, 품앗이 등을 통해 화투패를 따라, 입을 따라, 치킨을 따라 확산됐다. 동네 여론을 주도할 줄 아는 그 탁월한 능력은 한동네에서 바람난 전주댁 아저씨를 응징하거나, 혼자 사는데 풍이 와서 고생하는 박실 할머니네 자식들을 규탄하는 데서 진가를 발휘했다.
지금도 우리 자매들은 어떤 사건을 이슈화하고 집안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 의사결정을 주도하고 있다. 이렇듯, 여자들은 ‘힘’이 있다.
누구나 있는 비밀, 왜 비밀이 됐을까?
여성들 간의 관계는 실제보다 훨씬 소심하고 유연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비쳐진다. 동시에 지나치게 신비화되어 있다. 타자의 인정에 목마르고 주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서로 질투하고 감정적이란다, 여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은 정형화된 틀 안에 안전하게 존재한다. 어떤 여성들은 수용하고 누군가는 저항하며 누군가는 그 틀을 가지고 놀 줄 안다(예. 정이현 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나오는 여자들은 순결, 명품, 강남 등의 상징을 지배한다). 이 지난한 상호작용 끝에 각자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다종다양한 비밀이 생긴다. 정상성의 틀로 검열한 결과, 묻어두자. 타자의 시선으로 지배로서의 남성집단이 있는 이분법의 세상에서 9년 만 살고나면, 여성으로서의 비밀이 생긴다. 사랑이든 관계든 지배적 규범이 있는 사회 틀 밖에 있는 이들은 비밀(말 못하는 것, 한)을 주렁주렁 달고 살게 마련.
사랑>고마움>미움>괜찮음
올해 진행 중인 반차별 캠페인 ‘여자, 여자 사랑해요!’는 (다소 기름기가 흐르는 슬로건을 갖고 있지만) 비밀엽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비밀엽서는 미국의 예술가 프랭크 워렌이 시작해 미국 전역에서 대히트를 쳤고 한국에서는 한겨레와 민우회가(^^) 진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과연 엽서에 비밀을 쓸 수 있을까? 정말 그걸 보낼까? 싶지만, 5, 6월호 [함께가는 여성]의 독자엽서로 배포됐던 엽서들이 먼저 도착했다. 부평 우체국 등의 소인이 찍힌 엽서가 퍽 수수하고 예뻤다. 퀴어문화축제때 부스 뒤 구석에서 진행한 엽서쓰기는 대박이었다. 이후 ‘여기에 비밀을 쓰면 마음이 풀려요’가 있는 최신판의 엽서들이 도착했다. 고마운 언니, 미운년, 참 괜찮은 여자,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비밀 이야기를 적어달라고 했는데 사랑하는 그녀들이 가장 많았다. 이어 고마운 언니들이 존재감을 더했고, 미운년은 질투와 섞여 한 자리, 끝으로 참 괜찮은 여자들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사랑을 담은 엽서가 역시 뜨거웠다. “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같은 학교를 다니고, 여대랍니다!”, “쭛쭛아 사랑해! 엄마 호적파지마여” 등 동성의 파트너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기도 하고 사회를 향해, 이성애자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하지 못한 커밍아웃을 하기도 했다. 이성애가 ‘자연’인 세상에서 살다보니 비이성애는 ‘비밀’이 된 것이다.
비밀 공유하기는 친해지기 비법 제1장 1조.
“내 친구 쭛쭛은 유일한 내 가족… 아버지한테 맞고 난 다음날 그 애가 자기 아버지를 바람 핀 개새끼라고 했다”
“최고로 개털이었던 시절, 우리 언니가 20만 원을 빌려주었다”
비밀을 공유하거나 같이 저항하면, 특유의 유대감이 생긴다.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는 미움을 극복한 여자들이 혈연이나 정상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가족’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난 참 정유미 좋아하는데) 문소리와 고두심과 정유미는 서로 위로하지만 감정을 착취하지 않으며 따뜻하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이다. 아빠의 폭력을 치유할 힘을 주는 존재였던 누군가, 배고프고 허해 절실했던 순간에 늑대처럼 멋진 여성들이 있었다.
여자끼리의 증오심치료제 여성주의, 말하자! 놀자! 깨자!
여성들의 정치화, 연대는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내가 좋아서 선택했다고 믿는 것들이 구조에 영향을 받은 것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존재는 한없이 미약해진다. 목소리에 힘과 자신감이 없어진다. 결국 선택권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허용된 판이 좁았다면 그 구조를 흔들어야 할 것이다. 미움과 질투는 창조성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혼자라는 좌절감을 주고 그 감정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 있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약자들의 경쟁을 강화하는 것은 정상성의 세계에서 반복되는 것도 이 때문.
벨 훅스는 본인의 여대와 남녀공학대학의 경험을 비교하면서, 남녀공학에서의 여성들은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웃으며 수동적이고 성공을 꿈꾸지 않았다고 했다. 여자들끼리의 공간은 그래서 중요하다. 간혹 이 캠페인이 구시대의 향수를 전한다거나 분리주의로 보인다고도 하는데, ‘여자여서 그래’로 환원시키는 본질주의가 아니다. 여성경험의 발굴을 멈추는 순간 세상은 지나치게 관용적이 되는 것 같다. ‘국가를 뒤흔들 강력한 자매애’가 세상을 변화시켜왔다면, 그 힘의 원천을 고수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비밀을 말하고, ‘비밀스럽게’가 아니라 함께 보고 같이 놀고 그러다 보면 결국 나를 억압하는 것들로부터의 해탈이 올 것 같다.
선백미록(신기루) ●
고마움, 미움, 괜찮음, 사랑 무엇이든 적어보고 영혼의 힘을 기르시길.
나는 3장 이상의 비밀을 보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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