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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호 [민우ing] 여자들은 묻는걸 싫어한다고?
[민우ing]
여자들은 묻는걸 싫어한다고?
● 이윤소(윤소)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나 : 너 왜 약속 안지켜? 나랑 지난번에…
너 : …
나 : 너 지금 뭐하는거야!
'…’에 생략된 것은 키스. ‘나’와 ‘너’는 연애관계였다. 말다툼을 하던 중에 ‘너’는 나에게 키스를 해서 나의 말을 중지시켰다. 나는 무척 화가 나서 왜 그랬느냐고 따지고 들었지만, ‘너’는 씨익 웃으며 연인들의 싸움은 이렇게 마무리 짓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살아오면서 불쾌했던 일 Best 5에 들어갈 만큼 기억이 생생하다.
이 사건을 떠올리다보니 비슷한 경험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오늘은 싫어”, “그럴 기분 아니야”, “몸이 좋지가 않아” 등의 말로는 막을 수 없었던 순간들… 5번 척추가 6번 척추가 되도록 때려줘도 시원치 않을 일들이 나에게만 일어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도 여성의 “싫어”라는 말이 부끄러워서 내숭떠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일방적인 스킨십을 하는 세상의 수많은 ‘너’에게 말하고 싶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내레이션 : 여자들은
남자모델 : 키스해도 돼?
내레이션 : 묻는 걸 싫어한다. 사고접수 할 때마저도
자막 : 급한데 자꾸 물어보는 ARS는 이제 그만
24시간 상담원이 전화 받는 올리브 전용 핫라인 서비스
내레이션 : 급한데 자꾸 물어보는 ARS는 이제 그만
24시간 상담원 사고접수 서비스
뭐라고? 여자들은 묻는걸 싫어한다고? 메리츠화재에서 지난 10월부터 방송한 ‘올리브온라인자동차보험’의 <전용핫라인 편> 광고의 내용이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이 보험은 여성운전자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What Women Want, 여자 마음을 아는 보험’임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전용핫라인 편>을 보면 이 광고를 만든 사람들은 진정 여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 하다. 실제로 여성들은 상대의 질문에 불쾌감을 느끼기보다, 앞의 나의 경험에서처럼 일방적인 태도에 불쾌감을 느낀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중요한 코드가 소통, 존중, 배려라는 것을 왜 모를까!
미디어운동본부에서는 왜곡된 성문화와 여성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이 광고의 중단을 요구했고, 메리츠화재 측은 광고를 중단하고 향후 광고의 소재를 교체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왔다. 하지만 광고가 중단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공문에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왜곡된 성문화를 조장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이는 광고 크리에이티브1)를 보는 시각과 해석의 차이에서 이런 의견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찝찝함(?)을 속시원하게 해결해준 ‘귀신같은 누리꾼’이 있었다. ‘메리츠화재 車보험광고 물의(2010.12.4/서울신문)’라는 기사에 달린 깨알같은 댓글을 소개한다.
정작 광고 만드는 사람들은
갈고 닦은 프로 중의 프로들이다. 의도적으로 이러한 인간의 가장 깊숙한 금지된 욕망을 드러나지 않게 (오히려 드러나면 교육에 의해 반사적으로 거부함) 자극하기 위해 고도의 기법을 동원한다. 여기 댓글 쓰는 많은 사람들이 그 예이다. 그게 뭐 어떠냐고 하는데... 많은 광고들에 있어서 그걸 만든 사람들이... 복함적으로 장치한 심리 조작적 의도들을 스스로 까발린다면... 더 이상 그런 순진한 소리 못할 것이다...
즉, <전용핫라인 편> 광고는 남성의 일방적인 스킨십과 여성의 묵인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해 온 우리의 왜곡된 성문화를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불순한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불순한 ‘생각’은 숨길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 프로그램이나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은 늘 신중해야한다. (물론 방송사, 광고주도 여기에 포함된다.) 기발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시청자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콘텐츠 안에 올바른 가치를 심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모니터링을 하면서 굉장히 큰 힘을 얻었다. 생각의 차이는 있었지만 큰 문제없이 광고 중단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도 고무적이었고, 누리꾼들의 긍정적인 반응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묻는 걸 싫어하니까 묻지 말고 그냥 해버리라는 식의 광고내용은 좀 아니었음’ ‘그저 다 알아서 해주길 원하는 피동적인 것이 여자란 인상을 지울 수 없어서 기분이 나빴다’ 등과 함께 앞으로도 좋은 활동 해달라는 응원의 글도 있었다. 사실 악플이 더 많았지만(!) 그건 상관없다. 단 한 명뿐이더라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성평등한 미디어 환경 만들기’ 그 발걸음이 참 즐겁다.
*각주
1) 광고 크리에이티브(advertising creative)란 광고의 창작과정을 의미하는 말로 광고기획 과정을 통해 나온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윤소 ●
두근두근. 함여에 실리는 나의 첫 번째 글.
“너의 글에는 라벤더 향이 나”라고 ‘김주원’이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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