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4월호 [문화산택] 이른 봄, <만추>를 보다
이른 봄, <만추>를 보다
김윤아 ● 영화평론가
이른 봄, <만추>를 보러 간다. 일부러 아줌마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일요일 오후 영화관을 찾는다. 소실된 이만희 감독의 전설적인 <만추>는 보지 못했지만, 김수용 감독의 <만추>는 본 적이 있다. 오래 전에 보았지만 내게는 처음 만난 남녀가 정서적 교감도 없이 기차에서 정사를 나누던 파격적인 영화로 기억된다. 어린 나이에는 정말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영화였다. 그래서 <만추>가 다시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듣고, 주인공인 <색.계>의 탕 웨이와 <시크릿 가든>의 까도남 현빈이 벌일 파격적인 정사 신부터 기대하는 건 당연지사.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 섹시 스타인 그녀와 군입대날 2천명의 여성 팬들이 배웅을 나간 바로 그 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영화는 그런 기대를 조금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그 대신 내보이지는 않지만 진심을 느끼게 한다. 느낄 수 있는 사람만 느끼고, 볼 수 있는 사람만 보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흔들리는 두 남녀의 마음결을 애써 담담히 숨죽이고 따라간다. 이미 일주일에 이틀씩, TV 앞에서 싸가지 없지만 잘생긴 재벌 2세 백화점 사장님한테 마음을 빼앗겼고, 그래서 시키지 않아도 감동 만땅으로 펑펑 울어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영화에 신파는 한 오라기도 찾아볼 수 없다. 사실 2011년 <만추>의 감독이 김태용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소녀들끼리의 사랑을 그린 <여고괴담 2>의 감독이고, <가족의 탄생>을 만든 감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미 이 영화에는 노골적인 정사 신 같은 것은 없으리라는 것을 예견했어야 한다.
‘아줌마들’의 공감을 얻다
영화가 시작되자 잠시 후 보게 될 영화에 대해 수다를 만발하던 아줌마 관객들이 순간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이건 분명 발랄한 젊은이들이나 아저씨 관객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넋이 나간 듯 비틀대며 집 앞 길을 걸어 내려오던 여자가 다시 자기 집으로 향하는 그 장면은 결혼에 지친 여자들이 한 번 씩은 해봤거나 상상을 해봤던 그런 장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추는 한때 창창했던 아가씨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적당히 삶의 이력이 생긴 다음에, 혹은 여러 삶과 사랑의 고비 고비를 넘으면서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하며 뭔가 알게 된 인생의 가을을 짐작하는 어리지 않은 여자들에게, 조용한 관조와 반추를 느끼며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남편을 죽인 애나에게 나를 포함한 영화관 안의 아줌마들은 순식간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심정적으로 동일시되니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을 죽인 흉악범이 아니다. 그녀는 그럴 만했다. 남편이 죽을 짓을 한 거다. 자세한 앞뒤 사연은 모르겠지만 화장기 하나도 없는 여자의 얼굴은 친근하다. 그 한 장면으로 아줌마 관객들은 이미 그녀 편을 들기로 마음먹는다.
까도남 스타일의 현빈 같은 진짜 제비라면 여유 있는 누님들은 알면서도 속아줄 법도 하다. 아니 땡빚을 내더라도 그런 제비 동생 하나쯤 삶의 액세서리로 삼고 싶다. 그런데 영화 속 제비의 누님, 그녀는 더 진하고 야하게 질척대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니 삶의 의미는 사라진다. 의미가 없는 삶이란 살 가치가 없다. 그녀는 당연한 순서처럼 자유의지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사랑이 없는 삶은 죽어 마땅하다. 한편으로 무력해 보이지만 그런 그녀가 리얼하다. 돈 많은 미국 남자와 부족하지 않게 사는 여자는 행복하지 않았나 보다. 어쩌면 영화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제비 누님이나 애나는 사랑을 얻지 못해 죽거나 감옥에 갔다.
사랑은 자신을 찾아가는 것
어쩌면 여자들에게 사랑은 밥 같은 거다. 생일 이벤트나 축하선물처럼 매일 거창한 것을 원하는 건 아니다. 섹스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사랑은 매일 먹는 밥과 같아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애나가 원한 것은 일상의 밥 같은 사랑이었으리라. 그걸 깨달으려 그녀는 남편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녀는 약속도 하지 않은 그 사내를 기다리기로 한다. 사랑은 의지와 결심이다. 의심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작심한 듯 보인다. 지금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하니 탕 웨이의 연기가 탁월하다.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연기만이 잘하는 연기는 아닐 터이다. 그런 이쁘고 가녀린 식물 같은 여자가 어딘가 미국의 고속버스 휴게소 찻집에 그렇게 앉아 있을 것만 같다. 나팔꽃처럼, 덩굴식물 특유의 유연함과 생명력으로 해가 뜨면 꽃을 피웠다가 해가 지면 꽃잎을 닫기를 반복하며 매일 변함없이 그 곳에 뿌리내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꼭 그 남자가 아니어도 상관없겠다. 그녀의 기다림은 자신의 결심을 실천하는 것일 뿐 타인을 향한 적극적인 욕망의 발현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기 시작한 여자의 마지막 표정이 인상적이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와 평화가 깃들어 있다.
영화는 두 남녀가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나고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3일 동안의 이야기와 그 후일담을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조용히 속삭이듯이 그려낸다. 각자의 삶을 살던 사연 있는 두 남녀가 만나,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이 흔들리고, 또 생각지 못한 인연에 휩쓸려가고, 그 남자 혹은 그 여자가, 그러니까 내가, 아니 당신이 그 만남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그런 출렁이는 감정이 있지만 그 출렁임을 완전히 절제하고 속으로 삭여내는 이야기. 영화를 본 직후에는 아마도 당신이 기대했던 장면들을 보지 못해 의아하고 지루해 한숨이 폭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에게 두고두고 오래 기억될 영화, <만추>.
김윤아 ●
김윤아의 정체는 올해 주민등록증 발급을 받는 한 남자아이의 엄마이며, 한 학기에 수백명의 대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해묵은 시간강사이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이라는 재밌는 공부의 길에서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꺽은 90의 아줌마 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천마산이 보이는 곳으로 이사하여 아침마다 커튼 젖히는 일이 행복한 일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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